[서울생각 평양생각] 큰물 피해

올해는 유달리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도 비가 예상외로 많이 내렸습니다. 내 고향 북한에도 큰물 피해로 주민들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0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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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큰물 피해를 본 수재민들을 돕는 한국 국민과 세계 여러 나라 국민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방송국과 신문사들에서 수재민을 돕기 위한 모금 행사가 경쟁적으로 열리고 얼마 안 가서 엄청난 액수가 모이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것이 바로 내가 사는 대한민국이구나” 하는 긍지로 가슴이 부풀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수재민 돕기 프로그램을 보다가 안내해 주는 특정한 전화번호로 전화하면 바로 성금으로 처리되는 모금 운동도 있는데 저는 비록 2,000원짜리 전화 두 통밖에 못 했지만, 나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수해 복구 현장에서 땀을 흘리는 군인들과 평범한 시민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눈에 밟히는 것은 북한의 고향입니다. 제가 북한에서 생활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1992년 여름 사흘 동안 연속 비가 내리더니 대동강 구역을 비롯한 평양시의 몇몇 구역이 물에 잠기게 됐습니다. 내가 살고 있던 마을도 미림 저수지의 수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불어난 대동강 물이 동네 하수도로 콸콸 올라와 마을 전체가 순식간에 물에 잠기게 됐습니다.

갑작스러운 동사무장의 대피 신호에 따라 주변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몸은 피할 수 있었지만, 며칠 동안 상수도 고장으로 식수마저 끊기게 됐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온 마을은 아수라장이 됐고 집집이 변소 칸의 구정물이 가득 찼으며 구더기들이 둥둥 떠다녔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인민반장들은 인민반 경비를 위해 밤새워 물속을 헤집고 다녀야 했습니다. 자동차 기업소에서는 기름통이 넘쳐 구더기가 기름으로 범벅이 됐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물이 빠졌습니다. 집집이 가구들이 모두 못쓰게 됐고, 입을 것 하나 건지지 못했지만, 국가의 지원은 하나도 없이 개인들이 스스로 피해를 복구해야 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떼를 쓰고 어떤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졸음이 온다고 남의 복도에서 비닐박막 하나 깔고 자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은 대장염으로 앓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수재로 말미암은 피해로 잘 곳도 형편없고, 먹을 것도 부족했지만, 워낙 열악한 국가인지라 이런 수재민들에게 물이나 생활용품이 공급될 리는 만무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은 눈치 없이 물 달라고 울어댔지만,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복구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가을이 됐습니다. 불을 때려면 물에 잠겼던 방바닥을 다시 뜯고 고쳐야 했지만, 시멘트와 모래를 구할 수 없어 아궁이에 불을 땔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가정은 수리하지 못하고, 불을 때 석탄가스를 먹고 생명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고, 인민반장들이 순찰을 잘 못 했다는 이유로 인민반장을 직책에서 해임했습니다.

그 후로도 2000년 9월 중순, 큰물로 두만강에 사람이 떠내려가는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아우성만 쳤지 누구 하나 검푸른 물살이 두려워 뛰어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곳 남한에서의 상황이라면 살릴 수 있었던 생명일 텐데 말입니다. 지금도 두만강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자본주의 남한 사회와 사회주의라는 북한 사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똑똑히 알게 됩니다. 북한의 썩고 병든 사회가 얼마나 주민들을 피곤하고 힘들게 만들어가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올여름에도 남과 북이 큰물 피해를 보았지만, 남한은 온 국민이 하나같이 떨쳐나서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수재민 돕기 운동을 하고 있지만, 북한 주민들은 빈손만 쥔 채 하늘만 올려다보며 한숨만 쉬고 있을 것입니다.

언제이면 북한 주민들도 기아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향 생각을 하노라면 지금 이 순간도 가슴이 멥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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