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전공 탈북 여성의 유쾌한 통일수다 – ‘이공갑’③

워싱턴-김진국 kimj@rfa.org
202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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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전공 탈북 여성의 유쾌한 통일수다 – ‘이공갑’③
RFA 그래픽

(진행자) ‘통일의 주축, 장마당세대’ 59화 진행에 김진국입니다. 북한을 경험하고 북한을 전공하고 있는 북한 출신 여성 장마당세대의 유쾌하고 진지한 통일수다로 전해드립니다.

(진행자) 양강도와 회령, 무산, 연사군 출신인 한국 정착 여성 석사, 박사 학위 과정 학생들이 남한의 생활과 전공인 북한을 이야기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박세영) 저는 신라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를 했고 국제지역학과에서 박사 수료를 했습니다. (변선숙)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이구요.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북한학과 석사 과정의 졸업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김민세)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고, 카톨릭대학교에서 상담심리학 석사 과정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정영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나는 왜 북한을 떠나서 한국에서 공부를 시작했나>

(진행자) 북한을 떠나게 된 배경과 한국에 정착해서 어떤 계기로 박사 과정을 시작했는지를 이야 기 나누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박세영 씨가 탈북 계기와 박사 공부 배경을 말씀해 주시죠.

(박세영) 제가 처음에 한국에 와 가지고 정착할 때 5살배기 딸아이를 데리고 왔거든요. 너무 힘들더라고요. 처음 공부를 시작한 것은 사회복지였습니다. 저보다 후에 오는 후배들에게 무엇이라도 도와주고 싶어서 그 공부를 선택했습니다. 석사를 마쳤는데, 비록 북한에서 왔지만 북한에 대해서 지식적인 측면에서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북한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어서 국제지역학과 박사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현재 통일에 대한 강의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공부가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박세영) 제가 북한을 떠난 것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식량난 때문이다”라고 얘기들을 하는데 다 개개인의 사연들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상담도 하면서 보면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인권’ 때문에 북한을 떠난 경우가 많습니다. 대게 가정폭력의 피해자였어요. 저도 그중에 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장사를 하면서 여성으로서 인권이 너무 박탈되었다고 느끼는 거예요. 장사를 했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은 괜찮았어요. 내가 인간적이 대접을 못받고 사는 그 상황이 너무 견디기 싫었습니다. 북한에 살 때는 ‘인권’이라는 단어를 몰랐기 때문에 “인권 때문에 북한을 떠났다”라고 그 당시에는 말을 못했지만 “여성으로서 내 권리를 찾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민세) 저는 (2007년) 탈북하게된 계기가 되게 단순한데요. 당시에는 중국 쪽에 가면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면서 금방 북한으로 돌아 올거라고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중국에 막상 가 보니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살고 싶었는데, 아이의 호적(국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결국 한국을 가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3개월 정도 고민하다가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한국을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왔다고 할 수 있지만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세) 6살짜리 딸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왔는데, 한국에 대해서 잘 몰랐고 들었던 정보도 대부분 왜곡된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돈만 있으면 뭐든 다 된다” 이런 얘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기 때문에 한국 도착 후 막연하게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딸아이도 있었고 제가 특별한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제가 (부자가 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절약하는 것이었습니다. 덜 먹고 덜 입고 덜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딸아이가 제게 한 말이 있어요. ‘짠돌이’라고. 그렇게 힘들게 3년 정도를 버티다 보니깐 어느 순간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우울증이 와서 한 3개월을 밖에 안나갔어요. 그때 당시에는 그게 우울증인지 몰랐어요. 그냥 “밖에 나가기 싫어”라고 생각하고 어떤 때는 “목숨을 끊으면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때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교육도 많이 받고 하다보니 그때를 돌아보면 ‘아 내가 우울증을 앓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도로 긴장하며 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한계에 부딪히면서 그 긴장이 풀리면서 심경의 변화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많이 아프고나서 생각을 한 게 이렇게 돈만 바라보고 살면서 별의 별 일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아 좀 더 다른 삶을 살아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그 탈출구로 찾은 것이 공부였습니다. 학업을 시작하고 대학교를 졸업하는 시기쯤에 또 위기가 닥쳐와요. 그러다보니까 돈을 벌어야 되겠고, 3년을 돈을 벌려고 이런 저런 일을 했었요, 그러다가 ‘돈만 쫓으면 안되겠다. 이제는 욕심을 버리고 온전한 직업을 찾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해야되겠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공무원을 선택하게 됐고, 대학원을 가게 되었어요. 대학원을 간 후 내 삶이 굉장히 변했습니다. 대학교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저보다 나이 어린 동료들과 잘 지내지 못했고 적응하기가 어려웠어요. 대학원에 들어가니 저보다 나이 많은 분 도 계셔서 적응하기도 쉬웠고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깨닫았습니다. 그러면서 “아 나도 뭔가 사회를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통일 이후 북한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정영희) 저는 앞서 말씀을 한 다른 분들의 사연과 비슷하지만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인권 뿐만 아니라 여성의 차별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아무리 뼈빠지게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앞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강 건너 땅인 중국을 보면 그렇게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굶주림 없이 너무 잘 살고 있는데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도 이것 밖에 못살까’ 라는 생각에서 부터 여러가지 복합적인 잘 살기 위해서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 위해서 탈북했습니다.

(정영희)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된 계기는 한국의 지역통일교육센터에서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국에 온 직후부터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기 전까지 전문 강사로 활동했습니다. 북한에서 살았던 경험과 한국에서의 이론들을 조화롭게 배합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는 통일 교육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통일이 안됐으니 아직 만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남한 사람들과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 사이의 이해를 넓히고 신뢰할 수 있도록 역할하고 싶어서 통일 교육 전공을 시작했습니다.

(진행자) ‘북한 전공 탈북 여성들의 유쾌한 통일 수다’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진행자) 세대와 지역의 인식 차이를 넘어서 한반도 미래의 길을 찾는 나침반이 되려는 ‘통일의 주축 장마당세대’ 제59화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김진국입니다. 청취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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