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된 무급 초급당비서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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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시인이 된 탈북시인 최청하 씨.
남한에서 시인이 된 탈북시인 최청하 씨.
사진 제공-최정하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젊은 때는 열심히 일해 일터에서 승진을 하면 성공했구나 합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서는 일궈논 재산이나 명예보다는 자식들이 사회에서 제몫을 할 때 어깨에 힘을 줄수 있습니다. 보통 부모의 마음이 같을 텐데요. 오늘은 북한에서 무급 초급당비서를 하다 탈북해 남한에서 시인이 된 탈북시인 최청하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최청하: 북한에서 큰딸은 군에서 간호장 하다 제대하고 결혼하고 있다가 여기왔고 둘째딸도 학급이 다 나가는 농촌에 나갔다가 대학 못가고 여기왔고 아들은 고등학교 다니다 왔으니까 대학을 못갔고

북한에서는 토대가 썩좋지 않아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많았는데 남한에 가서 모든 것이 해결됐습니다. 자기만 열심히 한다면 정부에서 탈북민 지원을 해주니 자녀 셋다 소위 말하는 일류대학을 졸업해 부모의 책임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최청하: 아이들이 여기와서 다 대학졸업했어요. 큰 딸이 서울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수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둘째는 여기서 서강대 나와서 국방분야에서 일하고 있고 아들은 한양대를 졸업하고 회사 과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 자기일을 맡아서 똑바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정말 다른 사람에 비해 행복한 가정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저의 행복이고 앞으로도 큰 아픔없이 사는 것이 저의 꿈이고 희망이겠습니다.

북한이란 나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사는 것 뭐 특별한게 있냐 북한을 소개하는 사진을 보면 평양 대동강 강변에서 가족나들이 하면서 웃고 즐기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더라 물론 제한적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는 나름 자유가 있어 보이더라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착 북한에서 남한으로 간 최 씨는 자기가 살던 북한사회에서 보다 남한생활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최청하: 북한에서는 정치생활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조금이라도 성분이 불량하면 안됩니다. 저도 5촌 형님이 후퇴 시기에 북한에서 치안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가 제대를 하게 됐고 사회 나와서도 무급 초급당비서로 있었는데 성분이 걸렸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오래 있었고 당에 입당했고 했으니까 무급초급당비서라도 했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국에 오니까 물거품처럼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그리고 생활적으로 힘들게 밥먹거나 하는 것 없고 적당히 일하면 얼마든지 먹고살수 있는 이런 사회고 사람들 호상간에 큰 친목은 도모하지 않는다고 해도 서로가 개인문제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자: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을 해야하고 남쪽에서는 경쟁을 해야한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최청하: 제가 아는 탈북자들은 일하면 먹고산다 어디가서 그릇 씻는 일을 해도 먹고 살지 않는가 이럽니다. 탈북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노원구, 양천구를 가보면 일 안하고 낮에 술마시고 빈둥대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탈북자들 호상간에 이런 사람을 상당히 질책합니다. 물론 곁을 돌봐주지 않고 그런 것은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여기 복지관이 잘돼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사회복리하고 하는데 한국 사회에는 사회복지라는 것이 전혀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 오니까 그렇지 않고 동사무소가 노인이나 환자 경우는 생활비를 지원하고 하니까 상당히 마음이 안정을 가지게 돼있습니다. 저는 많은 경우 자본주의 사회는 정말 힘들다고 이렇게 말하는 경우 탈북자들 호상간에 많이 비판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한생활이 18년이 됩니다. 그간 잠시 기자로도 일했지만 대부분 시간은 탈북자 친목단체인 숭의동지회 사무국장을으로 보냈습니다.

최청하: 숭의동지회가 1968년 조직 돼서 당시에는 한국에 오는 귀순자가 전부 숭의동지회가 관리하는 것으로 돼 있었는데 그런데 숭의동지회 기본 임무는 탈북자 정착을 돕는 것이고 최종 임무는 조국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입니다. 제가 11년동안 만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인데 이 사람들 상담해 주는 것이 첫째 임무였습니다. 좋아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숭의동지회에 오는 사람 많은 경우가 울기 직전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르는 법적 문제는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는 일 또 강원도 철원에 견학을 1박 2일 가고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를 알게 하기 위해 일산에 있는 자동차 생산공장에도 가고 제주도에도 가고 이런 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상당히 즐거워했습니다.

최청하 씨는 숭의동지회 조직을 떠나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시인으로 등단하며 또 다른 인생을 맞습니다.

최청하: 사회에 나와서 제가 숭의동지회에 있을 때 잘 아는 실향민이 있는데 그분이 글을 좀 써봐라. 그래서 저는 중편이나 단편 소설을 쓴다기 보다는 그럼 시를 좀 써볼까 했죠. 전혀 해본적은 없었는데 이분이 문학박사를 소개해 줘서 그분에게 습작법을 좀 배웠습니다. 2013년에 글을 써서 시가 당선이 되니까 등단을 했고 그 이후에 명목상으로는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날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 그리고 살고자 하는 열망이 이 한 편의 시에 녹아았습니다.

내 그곳에 찾아가리- 최청하

자유를 찾아 떠나는 길 그리도 멀었다 그리도 험난했다. /내 몽고 키얼친 초원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따라 지친 발길을 옮긴다 길도 없이 목표도 없이 어둠 속에 동쪽만을 향해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가야 한다는 일념 날아든 모래 한 입 뿜어내며 별빛 없는 밤하늘에 천운을 빌며/ 쓰러질 듯 가는 앞길에 불쑥 하늘에 치닫는 철조망과 망루 입벌린 기관총구 탐조등 불빛에 숨죽이고 순찰차 소리에 가슴 쥐어뜯으며/ 가자 기어이 살아서 찾아가자 죽음과 맞서며 그래서 넘었다 세 겹 철조망 자유를 찾는 길 생사의 길이었다/ 나 이제 이 땅에서 안도의 숨 몰아쉬는 자유를 찾은 몸 빛 밝은 창가에 앉아 생각한다 내 삶에 지쳐 쓰러졌다 일어날 용기 없을 때 다시 그곳을 찾으리라

남한에 간 탈북자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함께 울고 웃으며 11년 또 그간 세 자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가정을 꾸리며 가족의 수는 늘어가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치열하게 사는 삶을 현장을 조금 벗어나 매일 마음에 글을 세기는 시인으로 그리고 봉사로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씨 좋은 이웃의 할아버지로 살고자 합니다.

최청하: 저도 이젠 70 나이가 넘어 들어갑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이북 5도청 새마을회 함경북도 회장을 맡고 있는데 시군 회장들과 함께 도회장 사업을 맡고 있으니까 앞으로 맡겨진 임무가 새마을 사업을 정말 성실히 해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고 또 이끌어가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제가 한국사회에 와서 정말 너무 많은 배려를 받았습니다. 즐겁게 큰 불편없이 가족과 살고 있습니다. 가족도 지금 다 제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저의 남은 여생을 즐겁게 자유를 찾은 몸으로 살아나가도록 힘쓰겠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시인 최청하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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