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돼야 도움도 받는다

경기도 북한이탈주민 취업박람회에서 한 구직자가 정성스럽게 입사지원서를 작성하고 있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사는 탈북자 수가 3만명이 훌쩍 넘었다는 얘기가 나온지 꽤 지났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남한에가면 정부에서 정착금도 주고 집도 주고 대학 등록금 지원도 해준다고 알고 있을 겁니다. 이렇게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북한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는 하고 남한땅을 밟을 겁니다. 오늘은 도움도 준비된 사람 몫이라고 말하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김혜진 (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혜진: 저는 2005년 7월 탈북해서 2006년 11월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북한에 굶주림으로 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시기를 잘 견디고 한숨 돌릴만한 때 김 씨는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김혜진: 탈북동기는 장사를 중국에 몰래 왔다갔다 했고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정보를 알았죠. 북한에서도 한국 드라마도 좀 보고 하니가 한국가면 아무래도 여기보다 괜찮겠다 했고 아들이 먼저 한국에 왔어요. 친구들도 한국간 친구들도 많고 하니까 저도 가야겠다 하고 결심이 서게 됐죠.

사실 1990대 중반 소위 말하는 고난의 행군 시절은 먹고 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도강을 했고 당시는 국경 경비로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했답니다. 그런데 김 씨가 두만강을 넘은 것은 2005년으로 어느정도 탈북자 단속이 강화됐을 때 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가만가만(몰래) 경비대 사람과 말만 잘하면 잠시 강을 건너갔다 오는 것을 눈감아 주는 일이 통했습니다.

기자: 두만강 건널 때 말이 쉽지 지금에서야 이렇게 말하지만 고민 많이 하잖아요?

김혜진: 두만강 건넌 것은 이미전에 살기 위해서 몰래 경비초소와 내통해서 몇 번 건너갔다 온 경험이 있었는데 한국 오는 것은 목숨 내걸고 하는 것이잖아요. 잠시 중국에 식량구하러 갔다 오고 하는 것은 국경경비대 초소원들한테 돈만 주면 할 수 있는 것인데 한국오는 것은 많이 망설였죠. 그분들을 다시 돌아온다고 속이고 건너야 하니까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들키기나 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했죠.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하도 떨려 심장이 튀어나오는 느낌이었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아무 사고 없이 도강을 했고 중국땅을 밟지만 최종 목적지는 남한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1년이 넘게 대기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김혜진: 일단은 아들이 중국에 와 있으면 브로커를 보낸다고 한 것이 쉽지 않았나봐요. 중국에 와 있어야만 어느때든지 브로커를 보내면 건너 올수 있잖아요. 그냥 북한에 있으면 아무리 브로커를 빨리 해도 북한에서 중국에 건너오는 시간이 있어 힘드니까… 중국에 건너와서 브로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더라고요. 기자: 막상 한국에 갔을 때는 (북한에서)드라마도 보고 먼저 간 친구들 얘기도 들어서 상상을 했을 텐데 어떻던가요?

김혜진: 막상 와보니까 처음에는 천국 같은 세상이죠. 하루 한 번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온수 냉수 나오는 것 차체가 신기했고 밤에 온거리가 조명이 밝은 것이 북한과 대조적이라 신기했어요. 또 먹을 것이 남아 돌아가고 우리가 처음에 하나원에 있을 때 뷔페라는 것이 참 이상했어요. 뷔폐라는 것이 자기가 먹을만큼 갖다 먹잖아요. 저는 처음에 그것이 신기했어요.

이미 탈북해 남한에 정착한 아들과의 재회 그리고 펼쳐진 새로운 세상. 김 씨가 남한에 도착했을 때 나이가 49살이었습니다.

김혜진: 정작 한국에 와보니까 자본주의 경제시장으로 사회주의와 다르잖아요. 그것을 인식 못하고 이해 못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다 보니까 처음에는 비참했어요. 여기는 일을 하는데 나이를 많이 따지더라고요. 북한에는 안그렇거든요. 우리 나이때는 한가지 직업을 가지고 전문가가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나이를 첫째로 따지고 능력을 따지고 그러더라고요. 저희는 여기 와서 영어를 알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나이 많은 것이 제일 애로더라고요.

기자: 북한에서의 직업은 뭐였나요?

김혜진: 저는 직업이 한국으로 말하면 회계, 부기원했어요.

북한에서의 경력을 남한에서 이어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모든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김혜진: 저는 컴퓨터를 처음 봤거든요. 컴퓨터를 전혀 모르고 오기 전까지 북한에서 주판을 썼는데 여기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했던일이 쓸모없는 일이 된거죠.

기자: 부기원을 몇 년하셨는데요?

김혜진: 부기원 25년 했습니다.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우선 많죠. 이제 배워서 내가 하던 직종으로 가자면 턱없이 부족한거예요. 그리고 컴퓨터를 배워도 나이가 50살이다 보니까 여기사람처럼 능숙하게 할 수는 없죠.

자본주의, 경쟁사회, 일하면 그만한 대가가 차려지는 곳 이런 말은 남한사회를 한마디로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즉 무슨 일이든 일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이 되지만 그 하는 일이 어떤 종류의 일인가 하는 것을 선택하자면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김혜진: 일단 사는 것은 괜찮은데 취업하는 것이 제일 난감하더라고요. 와서 한 1년 고생했어요. 주유소에서 일할 때 사실 컴퓨터만 배웠어도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었어요. 내가 돈 계산도 빨리 하니까 사장님이 사무실로 오라 하더니 컴퓨터를 켜더라고요. 그러더니 이런 것 할줄 아냐고 하더라고요. 모른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한국에서는 컴퓨터 모르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서 어디가서 식당이나 주유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날 문화진흥원에 가서 컴퓨터를 배웠어요.

김 씨의 성실함을 보고 주위에서 일자리를 소개해주거나 같이 일을 하자고 해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단순 노동일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직에 필수인 기본 컴퓨터 교육을 받았고 자격증을 취득한 다음에는 단순노동이지만 사무실에서 하는 기본 사무업무를 볼 수 있게 된겁니다.

김혜진: 배우니까 길이 열리더라고요. 지인이 소개를 해서 경희대학병원에 계약직으로 다녔어요. 대학병원은 다 지식인들이잖아요. 저는 의무기록과에서 차트관리를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일생을 산 사람들과 같이 섞여 일한다는 것이 참 난감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나를 봤어요. 그런데 저는 내색하지 않고 전혀 모르는 것처럼 하고 내 할일을 빨리 처리했죠. 남들이 다 퇴근해도 저는 남아서 그날 일을 반복하면서 업무파악을 했어요. 그러니까 거의 반년이 지나서 동료들이 나를 다르게 상대하더라고요. 거의 열달은 식당 주유소 할 때 그때는 단순노동이라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닌데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북한 여자가 어떻게 여기 들어왔을까… 그런데 그 적응기간이 한 6개월 걸리더라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김혜진(가명) 씨의 초기정착에 대해 전해드렸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남한생활 10년이 지난 현재 어떻게 변했는지 이후의 생활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