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봉사로 남한사회에 보답했다

부산-이진서 leej@rfa.org
201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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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강유씨 사무실에서.
부산 강유씨 사무실에서.
RFA PHOTO/ 이진서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나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북한에서 동의사였던 한 탈북자가 남한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이웃들에게 인정받고 부족함없는 제2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부산에 사는 강유 씨를 기자가 만났습니다.

(사무실)

여성: 선생님 별일 없으시죠?

강유: 안녕하세요

여성환자: 소화도 안되고 어깨도 아프고 해서 진료 받으러 왔습니다.

강유 씨가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사무실을 찾았을 때 마침 예약한 여성 한분이 방문했습니다.

강유: 날이 차고 하면 소화도 안되고 합니다.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혈액순환도 잘되고 합니다. 오늘은 침만 맞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요.

이 여성은 만성질병을 가진 환자이면서 동시에 강 씨에게 침술을 배우는 학생이기도 합니다.

여성환자: 편하니까 선생님께 오게 되요. 다른 한의원에서는 그냥 말을 잘안해주고 하니까 긴장한 상태에서 침을 맞는데 선생님은 친절하게 다 설명을 해주고 하니까 편안한 마음에 오게 됩니다.

기자: 한국분들은 아프면 양의를 찾는데 북한에서 온 동의사를 찾은 이유가 있나요?

여성: 제가 몸이 좀 안좋은 상태에서 대체의학을 배워서 제가 혼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을 때 우연히 강유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만나고 보니까 제가 생각했던 것 한의에 대한 두려움보다 강유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기자: 환자로도 시술을 받았지만 배워서 같이 봉사활동도 하고 그러셨나보군요?

여성: 네, 선생님에게 배워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같이 봉사활동도 많이 다녔죠.

여성환자가 침을 맞고 돌아간 이후 기자는 강유씨의 탈북 동기와 남한정착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기자: 선생님은 북한에서도 의사셨기 때문에 생활도 괜찮으셨을 텐데 탈북하게된 이유는 뭔가요?

강유: 저는 의사로 북한에서도 좀 잘사는 측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동생 3명이 굶어죽고 가족 7명이 굶어죽었어요. 또 내 담당구역의 환자도 많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사회주의 제도가 사람 죽는 것을 방치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많았고 울분이 터지고 했는데 그런 불평을 말한 것이 죄가 돼서 내가 남한 안기부 간첩이라고 밀고가 들어갔고 그 때문에 부득불 탈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자: 탈북해 남쪽에 와서는 의사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까?

강유: 아니죠. 오니까 학제도 인정을 안해주더라고요. 왜그러냐고 하니까 탈북자는 받았지만 정책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있을 수만 없어서 알아보니까 자원봉사 단체도 있고 해서 그러면 내가 한국에서 우리 가족을 받아주고 했으니까 자원봉사를 하자 해서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고 한의원에서도 고치지 못하는 이런 환자를 대상해서 하루 6시간씩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을 4년동안 자원봉사로 무료치료를 해줬습니다.

기자: 의사 국가자격증은 없었지만 봉사활동은 할 수 있었군요?

강유: 네, 정책이 제정되지 않아서 본국 사람이 무자격으로 시술하면 법적 문제가 되고 했지만 탈북자는 자격을 줄수도 없었지만 자격박탈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받지 않고 하는 자원봉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 자격증이 있었다면 돈도 벌 수 있었겠는데 선생님은 의료봉사 활동을 하면서 얻은 것이 뭔가요?

강유: 자기만족이죠. 한국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데 정착하라고 집 주지, 정착금 줬지 아이들 다 취직할 수 있었지 이런 것이 너무 고마웠어요. 나를 받아준 한국을 위해서도 또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료로 했지만 좋았습니다.

기자: 선생님 책상을 보니까 표창장도 있는데 상을 받으셨나봐요?

강유: 네, 탈북자 자원봉사자로는 2007년 처음 은뺏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알려져서 시장님에게  표창장도 받고 텔레비전 방송국 취재도 오고 부산일보에도 소개가 되고 했습니다. 많은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러니까 너무 고맙고 정착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선생님이 남쪽에 정착한 지가 얼마나 됐죠?

강유: 14년 됐습니다. 2004년 5월 입국해서 하나원 거쳐서 부산에는 8월에 왔습니다. 처음엔 의사를 못하니까 직업을 구했는데 직업소개소에서도 한달이 지나도 말이 없어서 물어보니까 그렇게 기다려서는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탈북자라는 것 때문에 아파트 경비도 안되고 심지어 우유배달하는 것도 탈북자라고 채용을 안해주더라고요.

기자: 그때 연세가 어떻게 돼셨었나요?

강유: 62세였습니다.

기자: 남한분들같은면 정년퇴직을 해서 제2의 인생을 사실 그런 나이인데요.

강유: 그렇죠. 그런데 한의사는 병원 침대에 자기가 눕기 전까지는 일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나이에 대해서는 전혀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기자: 남한생활에서 가장 큰 고비가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강유: 탈북자라고 해서 사람들이 외면한다고 할까요? 환자는 탈북의사라고 하면 반가워 하는데 그 환자들 시선과 다른 집단 모임이랄까요? 그런 곳에 가서 탈북자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고 또 어떤 분들은 탈북자가 여기 왜 왔냐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저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남북이 전쟁을 겪었고 북한의 김일성의 남침으로 인해 피해자가 남한에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고 내가 위축되거나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정착을 잘해서 이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과 똑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게 한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기자: 정착하는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강유: 그렇죠. 나는 남한에 와 살기 위해 탈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단신으로 중국으로 탈북했는데 중국에서 제가 의사생활을 하다보니까 내가 북한에서는 노예생활을 했던  것으로 느껴지더라고요. 북한에서 받았던 노임하고 중국에서 받은 노임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났어요.  중국에 와서 환자를 치료하면서 보니까 나도 얼마든지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 가서 생활할 수 있고 적응할 수 있다 하는 결심이 섰습니다. 막상 와서도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좀 극복하는 과정에  서러움도 있고 힘든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견뎌야 한다는 각오가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잘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부산에서 의료활동을 하는 강유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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