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후회하지 않겠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7.02.21
sueung_sulhyang_305 대학생 승설향 씨.
사진 제공-승설향 씨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인생은 두번 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습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매순간이 값지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데요. 북한을 탈출해 꿈을 가지고 남한에 간 탈북민들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학생 승설향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승설향: 그때는 그냥 도망쳐서 어디든 가야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어요. 중국으로 해서 다른 나라에 가서 좀 더 큰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함경북도 어랑군 출신의 승 씨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장마당에서 군인을 상대로 모자를 팔아 생계를 잇습니다. 그러다가 더는 안되겠다 싶어 외할머니와 2006년 12월 두만강을 넘습니다. 그때 승 씨의 나이는 19살이었는데요. 도강 당시 승 씨는 거기서 멈추면 잡혀갈  수밖에었기에 멈출수 없었다며 낯선 중국에서의 생활을 들려줍니다.

승설향: 저에게는 그냥 슬픔이었습니다. 일단 중국에 할머니 친언니한테와 교회밖에는 갈수가 없었고요. 교회에서 한국 사람들이 와서 선교를 하는데 내가 북조선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신원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서러움 두번째로는 중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원을 갔는데 신원 때문에 저를 받아주지 않는 그 서러움. 너무 슬펐습니다.

기자: 결국은 신분 때문에 공부를 더 하고 싶었기 때문에 남한행을 한 겁니까?

승설향: 중국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다른 세상, 안전한 세상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어릴 때 찾게 되었고 그것을 남한 선교사를 통해 알게 되어서 오게 된 거죠.

2008년 4월 남한에 입국한 승 씨는 우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단순노동 일을 합니다. 특별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인데요. 아무래도 몸은 힘들고 수입이 적은 일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을 찾아 눈을 돌리다 보니 바리스타 즉 커피 기계를 활용해 손님이 원하는 커피를 만드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승설향: 처음에 왔을 때 브로커비를 다 갚고 나니까 수중에 5천원밖에 없었어요. 먹고 살아야하니까 할머니 하고 파출부로 가서 일당 일을 했어요. 저는 당시 21살이었는데 할머니는 간병인 일을 했고 저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렇게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바리스타 교육을 받아서 창업을 하고 싶었는데 남한의 계약서나 운영 전반적인 부분을 모르니까 대학을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24살에 대학에 들어가게 된거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제 나이에 맞는 것을 찾게 됩니다. 무엇보다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선 당장은 생활이 힘들어도 돈을 버는 것보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요. 남한정부가 탈북민에게는 대학등록금을 지원하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승설향: 대학생활이 솔직히 어렵습니다. 여기 친구들이 건국대학에 입학하려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해서 들어오는 곳 아닙니까?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에도  친구들끼리 경쟁을 해서 성적을 받는데 저는 그런 과정없이 입학해서 힘들었고 수업 따라가기 조차 어려웠고요. 또 인간관계도 여려웠어요. 그냥 학교생활 자체가 어렵고 동시에 신기했고 신비롭고 뭔가 환상적이었어요. 지금도 공부는 어려운데 학교생활이 즐겁습니다. 친구들이 좋아서요.

건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한 승 씨.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학교 생활에 만족합니다.

승설향: 대학교 때는 남한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제가 계획했던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지원하는 창업 지원금을 받아서 온라인 쇼핑몰도 운영을 해봤던 경험도 있고. 제 능력 이상의 다양한 일들도 경험해봤고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뭐든 세상이 뭐든 마음먹고 열심히 하면 되는 구나하는 희망도 갖게 되고요.

경영학이란 말 그대로 경영 전반에 관해 배우는 학문인데요. 북한 장마당에서의 경험에 지식까지 더해져 인터넷 상에서 이뤄지는 전자상거래를 하게 됩니다. 승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기자: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용기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한국에 온지 3년밖에 안됐고 대학 1학년이어서 한국생활 정착하기도 어렵고 대학교 공부하기조차 어려웠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어요. 온라인 쇼핑몰은 아동복 판매였습니다. 동대문에서 도매로 사서 온라인에서 소매로 팔았던 거죠. 직접 모델을 섭외해서 촬영하고 했는데 매출은 크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문의를 해왔고 그 수량을 제가 충당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승 씨는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대학생 창업 프로그램에 옹모합니다. 24살 때인  대학교 1학년 때인데요. 당시 남한대학생들과 함께한 발표회 자리에서 트라우마 즉 정신적 충격을 받습니다.

승설향: 트라우마가 아이템을 발표해야하는데 프레젼테이션 구성부터 미미했고 그것을  설득력있게 말하는 전달방법도 부족했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전망에 대해서도 짧은 지식으로 발표한다는 차제가 부끄러웠어요. 남들은 잘하는데 나는 너무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그 트라우마가 너무 컸던 거죠.

잠시 정신없이 앞만보고 달려온 남한생활에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낀 승 씨는 대학을 2년 휴학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승설향: 일단 한국에 오니까 제가 몰랐던 세상이 너무 많더라고요. 북한을 떠난 이유가 더 큰 것을 보고 더 많이 배우고 싶어서 탈북했잖습니까? 제가 궁금한 것은 모든지 다 해보는 성격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회가 왔을 때 처음에는 적응이 좀 느리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먼저 앞선 친구들보다 훨씬 빨리가는 것이 정말 강점이라고 생각하고요.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 같습니다.

이제 대학 졸업반이 된 승설향 씨. 넘들처럼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구체적으로 앞날에 대한 대비를 해야겠죠. 절대 후회없는 삶을 위해 준비를 한답니다.

승설향: 사실 정상적이라면 4학년 2학기면 이미 취업이 돼있어야해요. 저는 작년부터 인턴하던 회사에서 직원으로 채용하겠다고도 했고 다양한 곳에서 제안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앞으로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전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몇 년만 지나면 보일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 기간에 좀 생활이 힘들어도 미래를 위해 투자해보고 싶다 다시한번 30대 처음이자 마직막으로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함께 탈북한 승 씨의 할머니는 어떻게 지낼까? 궁금하시죠. 할머니는  남자친구가 생겨 요즘 사랑에 빠져 있다고 하네요. 사랑의 힘일까요? 아픈 곳도 없고 남한에 너무 잘왔다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답니다. 그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이런 배우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승설향: 저는 함께 꿈을 만들어가는 남자를 원합니다. 그것이 사업이든 사회 인권활동이던 특정분야에서 남북한의 가교역활을 할수 있는 전문가 함께 손을 잡고 큰 것을 이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냥 동지 같은 남자요.

제2의 고향 오늘은 건국대학교 재학생 승설향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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