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한 사람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5.03.31
meat_store_305 사진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 GS슈퍼마켓.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끊임없이 다른 이와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행복해 지는 것인데요. 오늘 소개할 사람은 지금 자신의 생활이 굉장히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남한생활 7년차인 이용범(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이용범: 북한에 비하면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데 행복한 거죠. 만족하면서 사는 겁니다.

이 씨는 양강도 혜산이 고향으로 지난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현재 생활에 만족감이 큰 것입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어린 시절은 그 만큼 고통스런 시간이었기 때문이죠.

이용범: 제가 어릴 때부터 동생과 함께 중국을 넘나들었어요. 그때는 아버지가 젊으실 때인데 생활이 괜찮았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일하다 망한 후에 집 팔고 빚쟁이 오고 심지어 집이 없어서 남의 집에서 살고 그런 일이 많았거든요. 그때부터 아버지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타락 했죠. 살기 싫었어요. 일 안 나온다고 잡으러 오고 중국 갔다 왔다고 잡아가고요. 내가 왜 이렇게 사냐 하면서 압록강에 가서 물 건너 중국 교회 십자가를 보면서 하루 열두 번도 더 가서 남조선 가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아버지가 국경을 잘 알았어요. 경비가 교대하는 시간 물이 얕은 곳 다 알아서 가족이 아버지 따라서 넘어오게 된 겁니다.

이 씨에게는 두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들만 보고 있어도 행복해집니다.

이용범: 지금 9살, 8살입니다.

기자: 아이들을 데리고 남한에 간 것인가요?

이용범: 네 큰 아이는 중국에서 낳고 작은 아이는 오자마자 낳았어요.

남한에 가서는 여러 가지 일을 두루 하게 됩니다. 가장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식구를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한 건데요. 사람은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 씨는 한 직장에 오래 있지를 못합니다.

이용범: 이유가 있어요. 저는 아이가 아프면 병원도 가야하고 유치원에서 학부모 모임이 있으면 갈 수도 있는데 회사에 아침 9시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고 주말에도 나가 일하고 하니까 아이들과 대화도 못하고 힘든 부분이 있더라고요. 저는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되는 회사가 필요하거든요. 제가 그런 회사를 다니면 사장님이 사정을 봐주긴 하지만 한계가 있거든요. 회사가 바쁘면 나도 바빠지고 이상하게 그렇게 되고 해서 한 1년 다니다가 안 되겠다 싶었죠. 아이들 시간에 맞춰 일하기 위해 옮기는 거죠.

북한에서부터 목숨 걸고 함께 국경을 넘었던 아내와 헤어지고는 혼자 두 아이를 키우는 이 씨게 제일 우선은 아이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이 힘들거나 적응을 못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직장을 나오는 일이 많은 겁니다.

이용범: 처음에는 식당일 하고 다음에는 정육점에서 일했고 그 다음은 가구 회사에서도 1년 정도 일했고요. 한 달 전에도 가구 회사에 다녔는데 그 회사는 밤 12시까지 야근을 해야 해요. 내가 3월 1일에 아이들 입학도 시켜야 하는데 휴가를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못하겠다고 하고 나오게 됐습니다.

기자: 현실적으로 원하는 그런 일자리에서만 일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용범: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니까 한 5학년만 돼도 자기들이 알아서 하니까 저의 경우는 한 1-2년만 잘 버티면 되는 거예요. 애를 낳았으면 잘 키우는 것이 부모 도리잖아요.

이 씨는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는데요. 시간의 제약도 덜 받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자신의 가게를 여는 겁니다.

이용범: 제가 배운 것이 고기를 배워서 한 번 기회가 되면 정육점을 하고 싶어요. 실패를 하던 성공을 하던 한 번 고기 부문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기자: 예전에 정육점에서 일하실 때 즐겁게 하셨나 봐요?

이용범: 즐겁게 일했어요. 제가 모르고 있을 때 고기에 대해 알게 됐으니까요.

기자: 어떻게 정육점에 취직이 됐습니까?

이용범: 2008년에 한국에 왔을 때 식당에서 고기 숯불 나르는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사장이 내가 일을 잘하고 하니까 1년 있다가 식당에서 정육점을 같이 했는데 거기 보냈어요. 거기서 소고기, 돼지고기 다듬는 일을 했거든요 그렇게 몇 년을 일했죠.

20대에 남한에 간 이 씨는 보통 그 나이 또래의 탈북자가 남한에 가면 진학하는 대학엘 못 갔습니다. 나라에서 학자금 지원을 해주고 특례입학으로 별문제 없이 할 수 있는 공부를 못한 거죠. 그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데요.

이용범: 그 때는 혼자였으면 대학을 갔을 텐데 가족이 있다 보니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기자: 공부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까?

이용범: 미련은 있죠. 아이들만 컸다면 학원을 10곳이라도 다니고 싶어요. 할 수 있는 요리 자격증이나 컴퓨터 자격증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조건이 안 되는 거죠.

물이 반쯤 찬 컵을 보고 누구는 물을 반이나 마셨네라고 하고 또 누구는 아직도 반이나 남었어? 라고 한답니다. 같은 것을 보고는 각자 다르게 해석한다는 말인데요. 이런 비유를 통해서도 행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기에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씨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매일 행복하게 사는 것을 깨달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용범: 꿈을 이뤘고 지금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때 생각하면 충분하게 행복하게 사는 거죠. 아이들 키우고 사는 이 순간이 행복해요. 내가 북한과 중국에서 산 것이 너무 힘들어서요. 지금 통장에 10만원 있다고 하면 나가 일하면 되고 하니까 아무 걱정 없어요. 한마디로 긍정적으로 사는 거예요. 아이들 키우고 돈 벌자 있는 만큼 쓰고 없으면 안 쓴다. 긍정적으로 사니까 모든 것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거죠.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자 이용범(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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