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노래 불러 교화소 3년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4.07.29
mansudae_artgroup_305 사진은 탈북자들로 구성된 북한 만수대예술단 예술인들의 공연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가서 부르고 싶은 노래 마음껏 부르면서 노년을 봉사활동을 하며 보내는 이가 있습니다. 노래에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바로 탈북여성 지해남 씨인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12년이 되는 지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북한 “33대 선전대원” 출신인 지해남 씨 1993년, 남한 노래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부른 것이 화근이 돼서 교화소를 갑니다. 그리고 1998년 탈북하게 되는데요. 지 씨는 자신의 탈북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지해남: 당시 노래를 해서 비사회주의 날라리로 해서 교화생활 3년 받고 나왔지만 김일성이 죽고 난 이후에 아사자가 많고 배고프기도 하고 자식도 잃어버리고 남편과도 갈라져 있고 해서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나가자고 했는데 중국에 오니까 남조선 가라 하니까 마음이 흔들린 거예요.

개천 교화소에서 형기를 마친 지해남 씨는 1년 후 북한을 떠납니다. 교화소를 다녀왔다는 이유로 이웃도 등을 돌리고 하니까 직업도 없지 친구도 피해 다니지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 북한에서는 살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탈북해서 중국생활을 거쳐 남한으로 갑니다.

지해남: 만족하는 것도 있고 불만족 부분도 있는데 만족은 자유가 있어 좋고 자기만 노력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사람은 남한 사회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도움을 주니까 그럭저럭 삽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하니까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이 그립고 때로는 민주주의가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멋지게 부르고 싶어 탈북자들로 구성된 예술단 활동을 합니다. 남한주민을 상대로 북한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북한인권을 알리는 행사에 참석하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 열리는 국제인권대회에 가서도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증언을 합니다.

이제 예순 중반이 된 지해남 씨. 몸이 아플 때면 마음도 많이 약해지는데요. 최근에도 건강이 악화돼 요양원 생활을 한동안 했습니다.

지해남: 당뇨가 있는데다가 북한에서 오다 보니까 몸도 아프고 또 신경을 많이 쓰는 체질입니다. 상대가 생각 안 하는 것도 생각을 하다 보니까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체질이에요.

기자: 이번에 입원 하신 것은 당뇨가 문제가 된 겁니까?

지해남: 관절이 안 좋아요. 류마티스 관절, 퇴행성관절염 진단이 나왔어요. 신경도 예민해지고 하니까 그냥 병원에 있습니다.

기자: 3개월씩이나 병원에 있어야 합니까?

지해남: 집에 가봐야 혼자고 하니까 차라리 병원에서 안전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있어요. 병원비는 수급자고 하니까 의료보험 공단에서 보상을 많이 해주고 있습니다. 자가 부담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부에 고맙게 생각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남한사람들이 가난하고 못 산다고 알고 있었는데 정작 와서 보니 모두 너무나 열심히 일한다며 그렇게 번 돈으로 생활도 풍족하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니 북한에서의 직업이나 노동 강도는 남한의 것과 시작부터 비교가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지해남: 가장 어려운 것은 북한은 모든 기업이 국가 것이고 남한은 개인 기업이라 북한은 이직을 하면 다른 곳에 배치가 되고 하루 나가면 식량을 주고 했어요. 지금은 안 그렇지만요. 그런데 남한에 와서 보니까 자본주의 기업 노동 강도가 더 강한 것 같아요.

남한생활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북한사람이란 선입견으로 볼 때는 힘들다고 합니다.

지해남: 선입견은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사람들의 의식수준도 없는 것으로 알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고 물어 보는 것도 아주 수준이 없이 물어보는 경향이 많더라고요.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음반도 만드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는 지해남 씨 남쪽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인데 그것을 이루자면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기자: 창법이 달라서 듣는 사람입장에서는 낯설었을 것 같은데 남북한의 노래에 있어서 어떤 부분이 틀리던가요?

지해남: 이제 남한문화를 받아들여서 크게 어려운 것은 없는데 우리가 공연 다닐 때 보면 다들 북한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가성창법으로 하는데 남한 노래를 부를 때는 가성창법으로 하면 별로다 이런 말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기자: 요즘은 어떤 일을 하면서 지내세요?

지해남: 특별히 일하는 것은 없고 예술단 일원으로 장애인과 독거노인 찾아다니면서 봉사활동하면서 노래도 하고 무용도 하고 가야금도 좀 하고 다방면으로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도 즐겨 부르는 북한 노래가 있습니다. 설명과 함께 잠시 노래 들어봅니다.

지해남: 심장에 남는 사람들은 미국 사람도 그렇고 여기 사람도 많이 부르더라고요. 여기 노랫방 가도 이 노래가 있더라고요. 사람이 태어나서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내 기억 속에 없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잠깐 만나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이란 내용입니다.

(심장에 남는 사람들)

지해남: 북한에서 온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온 것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옛말에도 쌀독에서 인심난다고 배고픈 것이 없으니 좋고 생각이 변화된 것은 분명한데 나이를 먹으니까 걱정이 많습니다. 죽을 때 돈이 없으면 안 되겠다 생각하는데 남한 사람들은 수급자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하지만 홀몸이고 하니까 걱정이 많습니다.

올해 봄에는 유난히 북에 두고 온 아들 생각이 많이 나서 힘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지해남 씨는 노래를 불렀는데요.

지해남: 남쪽 노래는 꿈에 본 내 고향, 고향초, 기러기 아빠...4월 5일에 KBS 토요일 아침마당 가족이 부른다 프로그램에 나가서 1등을 했어요. 나간 이유는 아들을 못 만나고 있는데 세계로 방송되는 프로그램에 나가니까 다른 나라에 살더라고 혹시 나를 보고

알아보겠는가 해서 아들과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신청해서 나갔습니다.

(남한 가수 정재은이 부른 기러기 아빠)

지해남: 기러기 아빠는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를 다 잃고 우리는 외로운 형제다 지금 아빠는 어디 계신가 2절에 지금은 엄마는 어디 계신가 우리는 외로운 형제...이런 내용의 가슴이 좀 뜨거운 눈물겨운 노랩니다.

건강을 되찾는 데로 지해남 씨는 다시 힘차게 노래를 부를 겁니다.

지해남: 지금 계획은 한국 정부에 고맙게 생각하고 북한에서부터 음악을 하다가 왔기 때문에 돈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자원봉사를 하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어려운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노래로 그분들을 위로 하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지해남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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