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웃는 모습이고 싶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9.03
kim_jieun_prize_b 탈북 한의사 김지은 씨가 지난 2017년 일본에서 있었던 제4차 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에서 금상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김지은 씨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이 타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왕이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 멋진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랄텐데요. 북한에선 소아과 병원에서 근무했고 현재 남한에서 한의원 원장이 된 탈북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김지은 씨가 그 주인공 입니다. 오늘은 모든 이에게 웃는 얼굴로 기억되고 싶다는 김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지은: 제가 살던 곳은 함경북도 청진시 입니다. 청진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청진시에 있는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를 하다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 근무하다 김지은 씨는 지난 1999년 탈북합니다. 그 당시 상황이 도강을 결심하게 한겁니다.

김지은: 북한이 정말 어려웠던 1993년부터 95년 사이 소아과 의사를 하면서 어린 생명들을 속수무책으로 내가 치료를 할 수 없을 때 제가 의료인으로서의 자괴감과 책임감으로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많이 받게 됐고 현실을 탈피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됐고 그러면서 탈북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1993년부터 95년까지 만으로 꽉채워서 소아과 의사였고 실제 병원을 나온 것은 1996년 입니다. 그후   의학연구소에서 한 1년 있었습니다.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조선의학과학원 함경북도  임상의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지은: 좀 쉬었죠. 먹는 걱정도 하고 행방도 다니고 하면서요. 그러다가 북한을 떠나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당시는 한국까지 온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고요. 잠깐 북한을 떠나보자. 다른 세계는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떠났는데 결국 한국까지 오게됐습니다.

일반인도 아니고 그래도 사회 상류층으로 보이는 의사였는데도 생존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이유로 탈북했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김지은: 기본적으로 북한에 제대로 시스템이 살아있었다면 쉽지 않았죠. 그런데 1990년 초부터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어렵다 보니까 여러가지 시스템이 무너졌어요. 혼란스러운 상황이 됐죠. 북한정부에서 만들어 놨던 시스템이 무너졌고 일반사람과 마찬가지로 의사도 먹고 사는 문제에 치중하다가 나중에는 의사직업도 팽개치게됐죠.

이렇게 30대 중반의 나이에 북한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거쳐 남한에 도착합니다.

김지은: 남조선이란 나라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사회가 아니란 것이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굉장히 잘 살고 있었고 그리고 질서도 잡혀 있었고 사람들이 자유도 없는줄 알았는데 상당히 자유가 있었고 이런 부분들은 좋게 보여졌고요. 하지만 또 힘들었던 부분은 치열한 경쟁, 노력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그리고 노력해도 운도 따라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여러가지 어려움도 당연히 있었죠.

보다 나은 환경에서 북한에서처럼 치료약을 구하지 못해 아이들을 떠나보내지 않아도 될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남한에서 의사의 직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습니다.

김지은: 의사는 난 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쪽 공부를 17년 했고 의사생활을 했으니까요. 다만 한국에서 자격을 인정 받겠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한국에서는 북한에 가서 북한에서 의료행위를 할 때 서류를 가져오라 그렇게 얘기를 했고 또 한국의 한의과 대학을 졸업한 자격은 줬지만 시험칠 수 있는 자격은 안준다든지 이렇게 굉장히 각 부처들 간에 책임을 지지 않는 모순된 것에 충격과 좌절을 했었죠.

세월이 지나고 보니 당시 상황이 이해 되는 부분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가 좌절도 줬지만 노력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 씨는 현실 상황을 극복하게 위해 법에 호소합니다.

김지은: 국회에 청원을 냈습니다. 한국에 와서 의사고시 시험을 치자. 북한에 가서 가져오라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하고 국회의원에게 청원을 내서 2004년 10월 4일 국무조정실 국정감사에 참고인 자격으로 참가를 하게 됐고 여야 국회 의원들 앞에서 이런 상황을 얘기 했죠. 나는 분명히 북한에서 의사생활을 했으니까 검증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

김 씨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법이 개정되기 까지 3년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후 남한에 간 탈북의사들은 혜택을 보게 됩니다.

김지은: 그 전에는 북한에서 의사자격을 가지고 온 사람이 한국에 와서 자격을 받으려면 북한에 가서 의사를 할 때 소지했던 서류를 가지고 오라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청원을 넣은 다음에는 북한에 가서 서류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한국에서 국가고시 시험을 칠수 있게 법이 바뀌어졌습니다.

김지은 씨는 법 개정이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그 기간동안 한의과 대학에 입학합니다.  남한은 북한과 달리 예과 2년 본과 4년입니다. 김 씨는 북한에서 의사였기에 예과는 안다니고 본과 1학년부터 4년, 대학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준비를 했습니다.

김지은: 우선 20대와 함께 공부한다는 것도 좋았고 제가 30대 후반에 다시 학부생활을 한다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좋았습니다. 내가 그동안 배웠던 것은 북한의 의학이지 한국의 의료는 아니니까 내가 다시 여기서 한국의 의료를 배우는 것도 좋았습니다. 다만 어려웠던 것은 영어와 한문은 내가 익숙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이라 굉장히 어려웠죠.

의과대학을 졸업한다고 의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국가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의료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김 씨도 그 과정을 거칩니다.

김지은: 국가고시 시험이란 것이 1년에 한 번 치룹니다. 그래서 그 한 번을 위해 1년을 투자를 해서 굉장히 어렵고 긴장된 시험인데 저는 또 처음이라 힘들었고요. 학우들이 열심히 도와줘서 일단 시험은 잘쳤지만 결과는 어떨지 몰랐는데 학장님이 직접 전화를 줬어요. 김지은 씨 합격입니다 하고요. 그때 계단에 주저 앉아서 막 소리내 울었던 기억이 나고요. 그리고 바로 개업을 했죠.

남한이란 사회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면서 장애가 발생하면 피하지 않았고 정면돌파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반 병원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의사로 환자를 볼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병원도 운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되는데로 국내는 물론 해외로 의료봉사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김지은: 행복했던 순간은 치료가 잘될때죠. 예를 들면 한국은 양한방이 완전히 갈라져 있잖아요. 간염, 고혈압, 간복수 환자는 한의원에서 못 봅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그런 환자도 다 한방에서 치료를 했기 때문에 제가 가끔 그런 환자가 오면 환자에서 설명을 하고 보는데 증세가 호전이 되던가 하면 제일 기쁘고요. 그 다음 제일 기뻤던 것은 제가 북한을 떠나올 때 아들을 두고 왔었어요. 한국에 와서 10년만에 아들을 데려왔을 때 그때가 제 평생 제일 기쁜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부끄럽지 않은 시간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김지은 씨

김지은: 제가 목표가 없다고 하면 웃긴 삶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물 흐르듯 살아가고 싶거든요. 다만 환자들에게 비춰지는 제 모습이 잘 웃는 선생님, 거기가면 늘 웃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 얘기는 꼭 듣고 싶어요. 그게 어쩌면 목표라면 목표죠.

제2의 고향 오늘은 동의사 김지은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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