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TV 드라마가 아니야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7.10.03
defector_resume_b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4 북한이탈주민 채용박람회장을 찾은 구직자들이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간혹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멋진 인생을 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의 현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만들어진 세상이란 것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현실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시시각각으로 발생하는 흥미진지한 무대인데요. 오늘은 북한에서 본 한국의 드라마는 현실과 달랐다고 말하는 30대 중반의 박경숙(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경숙: 오게된 것은 사실 궁금했죠. 한국이란 사회가 어떤 곳인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간다고 하니까 나도 가서 살고 싶다. 그리고 북한 체제에 대한 실망도 있고 해서 나도 한 번 가보자.

양강도 출신의 박 씨는 2011년에 가족과 함께 탈북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남한행을 했습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2000년 초에 더는 북한에서 살 수가 없었기에 탈북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박 씨는 먼저 탈북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새로운 세상을 찾게 됩니다.

박경숙: 라디오 방송을 새벽 4시면 하는데 먼저 남한에 간 사람들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한국 갈때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데 오고 보니까 살만한 세상이고 오길 잘했다. 이런 방송이 나왔어요. 그리고 씨디알을 보면 그걸 보고 저런 곳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고요.

주파수를 맞춰놓고 들었기 때문에 다양한 외부세계 방송을 듣질 못했고 우연히 듣게 됐던 라디오 방송은 중독성이 강해서 그 시간을 기다렸다가 듣는 애청자가 됩니다.

박경숙: 그것도 굉장히 새벽녘에 잘들려요. 낮이나 초저녁에는 잡음이 너무 많이 거의 못듣거든요. 항상 그 시간에 듣다 보니까

탈북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단연코 외부세계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입니다. 게다가 가끔씩 보게 됐던 씨디알을 통해 남한의 드라마와 영화에 푹 빠져서 박씨 가족은 마음을 정한거죠. 정착 남한에 갔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박경숙: 뭐라고 표현을 해야할까요? 느낌이라면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어도 북한하고는 모든 것이 밖에 나가봐도 그렇고 한국사람집을 방문해도 그렇고 굉장히 멋있다 이런 느낌?

일단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달랐습니다. 거리에는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달리고 주위를 돌아보면 온통 하늘높은줄 모르고 뻐친 고층건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다르기는 분명 다른데 북한에서 본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모습과 어떤 것이 다른지 꼭찍어서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박경숙: 그런거죠. 제가 방송을 듣고 할 때는 저희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좋을 것이다. 이런 환상을 갖고 온분도 있을 거라고 봐요. 저 같은 경우는 그런 환상은 없었어요. 우선 자유롭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먹고 사는 것도 좋다 해서 왔는데 막상 와서는 하나원 있을 때는 주는 것 먹고 강의듣고 해서 몰랐는데 딱 하나원 나와서 보니까 제가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뭔가 틀리더란 거죠. 자유는 잘돼있는데 북한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생활이 있으니까 이런 부분은 힘들다 했죠.

북한에서 듣던 방송 내용은 이런 겁니다. 남한정부는 탈북자가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정책을 펴고 있다. 일한만큼 벌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와보니 현실에서는 스스로 알아서 일을 처리해야 하고 자유에는 의무도 따른다. 이런 내용은 북한에서 들었을 때는 그냥 흘려들었던 겁니다.

박경숙: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세금을 많이 내야한다든지..우리는 자유하면 듣기로는 내가 번것만큼 내가 쓰고 살고 누구도 간섭을 안하고 그렇게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더라고요. 또 보호를 받는 다는 차원에서 경찰이 연락도 하고 하니까 보호를 받는 그런 관심들이 부담스러운 거예요.

기자: 하나원을 나와서는 취업을 바로 하셨나요?

박경숙: 저는 바로 나와서 일주일만에 알바를 했어요. 한 3개월 하다가 요양보호사 학원 다니면서 자격증 따고 다시 회사에 취직 해서 일을 했죠.

기자: 지금도 계속 같은 회사에 다니고 계십니까?

박경숙: 현재는 아들이 11살인데 아들 챙겨준다고 정수기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전에는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기자: 남한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셨는데 일을 할만하던가요?

박경숙: 해볼만도 하지만 제가 대답을 드릴 수 있는 것은 해볼만 하다 어짜피 내가 일하면 돈을 주니까 하지만 쉽지는 않구나…

자본주의에서 사회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히 내야 하는 세금에 대해서도 왜 자신이 번돈을 정부가 일부 가져가는 지 이해가 안됐습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보여주는 관심에 대해서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제일 힘든 것은 인간관계였는데요.

박경숙: 노동은 북한 사람들은 원래 일을 워낙 많이 하다보니까 일에 관해 서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저 같은 경우는 재밌기도 하고요. 일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해볼만 해요. 그런데 회사원들과의 관계에서 저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 그런 것이 신경 쓰이고 쓰는 말이 틀리기 대문에 말 한마디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요. 회사에 나가면 그런 것 때문에 힘들지 일은 안힘들어요.

박 씨는 어린 아들과 함께 남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이는 북한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고 남한 아이들처럼 초등학교부터 시작했죠. 자녀교육의 문제는 남한이나 북한 엄마들이 제일 신경을 쓰는 부분인데요.

박경숙: 어렵지는 않아요. 원래 한국 엄마들이 아이들 학습에 대한 열의가 워낙 높다 보니까 그것을 따라가기는 힘들고 저는 나름 대로 제방식대로 아들 교육에 신경쓰고 있고요. 아들이 잘해주니까 그렇게까지 학교문제는 신경은 안쓰고 살아요.

기자: 아들이 몇 학년 입니까?

박경숙: 초등학교 4학년이요?

기자: 학원도 보내고 그러십니까?

박경숙: 아니요. 학원은 안 다니고요. 방과후 학교를 주로 활용하는데 남들만큼은 하거든요. 제가 더 잘해라 이런 말을 안하고 살아요. 아이가 운동을 좋아해서 좋아하는 것을 많이 시키는 편이죠.

드라마 속의 주인공도 처음부터 주인공이진 않았을 겁니다. 단순 조역에서 실력일 인정받아서 조연이 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주인공이 되고 이러지 않았을까요? 잠시 남한에서의 시작이 어렵다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들의 말만 듣고 들떠있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박경숙: 계획은 어머니까지 모셔오면 대학공부를 할까 합니다. 지금은 자금도 필요하니까 일을 하는데 대학공부를 해야죠

기자: 대학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시고 싶은 겁니까

박경숙: 저는 간호사 공부를 하고 싶어요.

자신만의 진짜 드라마 즉 인생의 주인공이 된 세상은 남한에서 시작됐습니다. 아직은 엉성하고 만족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절대 후회해 본 적은 없답니다. 특히 무럭무럭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들을 볼 때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박경숙: 저는 여자가 살기 좋은 세상이라 사실 주말에 한번 식당에도 가고 영화도 보고 하면서 살기좋은 세상이다. 아들을 볼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다할 수 있으니까 아들보면서는 내가 오길 잘했다. 길게볼때는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개인사업을 하고 싶어요. 간호사도 해보고 싶긴 하지만 오래할 것은 아니고요. 회사출근 안하고 할 수 남편과 하는 개인사업을 찾고 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박경숙(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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