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정경화 씨⑤ 식당일 하며 한국으로 탈출 준비

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여성시대에서는 격주로 탈북자들이 전하는 그동안 하지 못한 얘기를 듣는 시간입니다.
워싱턴-이원희• leew@rfa.org
2009.08.24
북한에서의 생활, 탈출, 중국에서의 숨 가쁜 얘기들 그리고 제 3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가기까지 많은 사연을 눈물과 한숨, 그리고 웃음으로 풀어놓습니다.

지난해 남한으로 입국한 정경화 씨의 사연 연속으로 보내드리고 있는데요, 정경화 씨는 북송돼 노동 교화소에서 나와 북한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장마당에서 생선도 팔아보고 미용기술을 배워 곳곳을 다니며 미용 일도 해 보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맙니다. 정 씨가 브로커, 중개인을 따라 다시 중국으로 탈출해 인신매매를 당하다 만난 사람은 폐결핵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으로의 탈출이 어려워지자 이 환자를 떠나 보험회사에 다니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한국 음식점을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안녕하세요?

정: 안녕하세요?

질문: 오늘은 지난 일 얘기하기 전에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요, 최근 중국에 다녀오셨죠? 이제는 중국에 가도 별다른 위험은 없나요?

정: 산둥에 다녀왔는데 길림보다는 산둥이 안전한 것 같아요.

질문:
그곳에 지금도 탈북자들이 있죠?

정: 네 이번에 갔을 때 북한 여자들 있다고 하면서 누가 북한 여자들을 한국으로 데려 갈 수 있도록 줄 좀 놔달라고 하더라고요.

질문: 이번에 중국에 가서 북한 소식 좀 들으셨어요? 북한은 지금 몹시 어려워서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이 가족들을 많이 돕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요.

정: 네, 북한에서 온 내 동생뻘 되는 처녀가 부모와 오빠를 두고 혼자 중국을 거쳐서 한국으로 왔는데 북한에서 돈을 보내라고 한데요. 오빠가 한국으로 말하면 수급자, 그러니까 사회보장으로 되었다며 월급도 못 받고 사회보장이 되면 노약자에 해당하는데 북한의 쌀값도 비싸고 하니 살기 힘들죠.

질문: 그러면 배급이나 식품 같은 것도 전혀 안 나오나요?

정: 북한은 내가 2000년도에 중국으로 넘어갈 때만 해도 배급이 전혀 없었어요.

질문: 그러면 수급자가 되면 어떻게 살아요?

정: 직장생활을 못하고 집에서 노약자처럼 있는 거죠. 그러니까 사회보장으로 된 사람들은 국가에서 보장해 주는 것이 없이 그냥 휴직시키는 거죠. 한국과는 너무 달라요 한국은 일 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수급자는 국가에서 일정 금액을 주고 쌀을 주죠. 그런데 북한은 아예 아무것도 안 주어요 그러니 너무 어렵죠. 그 동생뻘 되는 처녀는 한국에 오자마자 중국을 통해 북한 가족들에게 연락 했어요. 최근에 연락을 해보니 오빠가 사회보장이 되어 힘들다며 울면서 얘기를 하는데 돈 좀 보내 달라고 하면서 오빠까지 사회보장이 되어 이제는 죽게 되었다며 작년보다 올해가 더 힘들다고 하더랍니다. 그렇게 돈을 보내라고 하니까 나한테 전에 50만 원을 꿔달라고 해서 꿔줬어요. 아직 이 처녀는 돈을 벌지 못하고 학원에 다니는데 이번에 30만 원을 받은 데서 자기 쓸 돈 5만원 빼고 꾼 돈 50만 원 중 25만 원 절반만 먼저 주겠다고 하면서 꾼 돈을 모두 갚지 못해 미안하고 할 얘기도 있다면서 전화를 한 겁니다. 전화로 울면서 얘기하는데 들어보니 북한에 있는 부모가 불쌍하고 오빠는 영양실조로 사회보장대상이 된 것 같다며 자기가 지금은 학원을 다니고 있어 돈을 벌지 못하니까 돈이 없을 때 오빠가 그렇게 되어 돈을 보내달라고 해도 보낼 수가 없어 너무 안타까워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지난번에 전화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돈을 얼마 보내지 못했대요. 겨우 100만 원 미화 900달러 정도 보냈다는데...

질문:
그런데 그 100만 원도 가족들이 다 받지도 못하지 않아요? 중간에서 수수료를 떼고 하니까...

정:
그렇죠, 중국을 통해서 가니까 70만 원을 중국 돈으로 바꾸어 보내죠. 30만 원은 연결해 주는 사람이 먹고 30% 결국 70만 원이 북한으로 들어가는데 아버지 어머니 오빠 3식구가 있으니까 기껏 3달까지 지낼 수 있을지 하면서 더군다나 이 동생이 처녀로 있으니까 한국에 와서 북한 사람들이 언어도 같고 하니 한국 사람들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지내보면 너무 힘들어요. 특히 북한 여자가 한국남자를 만나려면 더해요. 동생이 아직 남자 친구를 못 만났어요. 북한에 부모를 생각해서 혼자 있기보다 남자친구라도 만나며 남한사회에서 모르는 것에 대해 도움 받으면 힘이 되죠. 그런데 남자 만나는 일도 잘 안되다는 속 타는 얘기도 하더라고요. 이렇게 북한 사람들로부터 얘기 들으면 나도 북한에 오빠가 있고 남 동생이 있지만 연락할 엄두를 못 내요. 아직은 혼자니까 북한의 오빠나 동생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하느라고 일부러 연락을 안 해요. 나도 전화로 연락해서 잘 있는지 알고 싶어도 그런 형편이 아니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와서 자신도 북한에서 살 때 그 어려웠던 생각에 한국에 오자마자 연락해서 소식을 들으면 계속 벌어서 보내는 거예요 한 달 벌면 120-130만 원, 미화로 1,000달러가 좀 넘지 않아요. 거기서 20만 원 떼고 100만 원씩 해서 두 달에 한 번 150만 원씩 어떤 때는 월급을 통째로 200만 원을 보내기도 해요. 200만 원을 보내면 중국에서 연락해 주는 사람들이 떼고 나면 기껏해야 150만 원 정도 그러면 중국에서 북한에 연락해서 한국으로 직통으로 연락해 준 데요. 돈을 잘 받았다고 울면서 얘기하면 자기가 힘들게 벌었다는 생각보다 내 돈이 가서 가족들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힘든 것도 잊어버리고 더 열심히 벌게 됩니다. 이렇게 전화로 잘 받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힘이 나고 좋다고 해요.

질문: 그러면 다음에 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나겠죠.

정: 그렇죠, 한국에 와서는 입에 풀칠도 못하는 사람은 없죠. 아무리 어려워도 대한 적십자가 도우미들이 있고 경찰서에 담당 형사도 있고 하니 도와주고 그리고 북한에 비하면 고급생활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돈이 단 몇 십만 원만 있어도 다만 얼마라고 북한에 보내주려고 하죠. 북한의 부모나 형제를 생각해서 계속 보내고 있습니다. 그 동생도 울면서 이런 얘기를 다 해요.

질문: 네, 잠시 그동안 중국에 다녀온 얘기를 전해주셨는데요 이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새로 만난 보험회사에 다니는 남자의 도움으로 대학 식당에서 일하다 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까지 들었는데요, 그 후의 얘기부터 들려주시죠. 어떤 문제였어요?

정: 대학 식당에서 9월6일부터 11월까지 일했어요. 그런데 다른 일이 생겼어요.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신분증을 다 모아서 회사마다 명판이 있지 않아요, 앞에다 회사이름도 쓰고 ...

질문: 명함인가 봐요 직책도 쓰고요.

정: 네 그런 것을 만들어 준다는 거죠. 그런데 나는 신분증이 없지 않아요. 그래서 보험회사 사람에게 전화했더니 그 사람은 내가 일하는 대학에 간부로 있는 자기 여동생에게 전화 했어요. 그 여동생은 신분증이 없어도 괜찮다며 자기가 말해주겠다고 하던데 나는 한번 북송돼서 아주 혼나지 않았어요. 문건이고 신분증 얘기가 나오면 나는 거기서 있지 못하죠. 그래서 한참 말씨름을 했어요. 나는 안 된다 이러면 여기서 일을 안 하겠다고 그랬죠. 내가 얼마나 버텼는지 명판 만든다면 일 하지 않겠다며 그만 두었어요. 혹시 공안이 와서 서류를 보고 공민증이 없으면 불러다 물어보면 말이 다를 수 있고 시끄럽거든요. 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공안과 맞대지 말아야 해요.

질문: 그렇죠, 잘못하다 들통 나기 쉽죠.

정: 네 결국 안하겠다고 하고 꼼짝 안하고 방에만 있었어요. 거의 한 달을 놀았어요. 왔다 갔다 하지도 못하고 밖에 나가면 전에 살던 곳과 가깝고 또 아는 사람들 눈에 띌까 봐 버스를 타려도 그전의 환자였던 남자를 만날까 두려웠고 택시를 타려니 택시 값이 너무 비싸지 그러다 마침 내가 세 들어 사는 뒷집에서 식당을 꾸리고 있었어요. 대학 근처에서, 그래서 그 아주머니가 나보고 일하지 않겠느냐고 묻기에 내가 일하다 휴식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면 자기네 집에서 일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 집에서 일하게 되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혹시 공안이 조사하러 나오면 그 집 아들이 다 얘기해 주어서 대학 식당에서 일하는 것보다 개인이 하는 식당이 훨씬 나았어요. 한번 공안이 와서 조사할 때 같이 동거하는 보험회사 사람이 다 얘기하고 문건도 보여 주었어요. 그리고 공안이 오면 일단 일하다 숨었다 공안이 가면 다시 나오곤 했어요.

질문: 그러면 그 당시도 공안이 탈북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수시로 다녔어요?

정: 아닙니다. 우리가 있던 곳은 탈북자보다도 외부사람을 조사하기 위해서죠. 중국은 먼 곳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 이동이 많아요. 그래서 외지사람들 본거지 사람을 가려내고 드문드문 신분증 검사도 했어요. 대학가라 그런지 그럴 때면 시끄러웠어요.

질문: 그러면 외지에서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증만 있으면 외지에서 왔다가 가도 되죠?

정: 네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해요. 마음대로 일 할 수 있고요. 그래서 내가 그 집에서 일도 많이 배우고 하루에 어떻게 일하면 대강 수입이 얼마가 나오는지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내가 그 때 나는 무조건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음력설 때는 대학이 방학이고 또 모든 사람이 고향 집에 가니까 그런 때 나도 세든 집에 와있었어요. 방학이 끝나고 3-4월부터는 내다 땅을 사서 제가 신분증은 없지만, 전에 살던 환자인 남자로부터 그 지역의 문건을 가지고 있었어요. 병력이 적혀 있고 사진도 붙어 있는 그 문건을 보이며 이번에 신분증을 못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문건을 들이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개인 집에서 하던 식당에서 일해 보니 너무 힘들고 월급이 너무 적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식당을 해야 되겠다 싶어 4월에 식당을 할 만한 땅을 보러 다녔습니다.

질문: 식당을 할 땅을 본다는 것이 땅이 아니라 가게인가요?

정:
아닙니다. 그곳에서 가게는 비싸고 땅이 있어요. 땅을 4평방미터씩 나누어 팔아요. 그래서 그 땅에다 비닐하우스 설치하는 것처럼 해서 식당을 꾸리거든요. 그래서 내가 엉뚱하게도 그런 식당을 꾸린다니까 그 당시 같이 살던 보험회사 사람이 돈을 해 주었어요. 장사를 해 보니 수입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방송 들으면서 방송국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그 남자가 혹시 전화가 올지도 모르겠다며 전화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질문: 그래서 편지 받고 전화를 했었죠.

정:
네, 하루는 이상한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무슨 전화 인지 몰라 받을까 말까 한 참 망설이다 전화 받았는데... 야! 안녕하세요 미국에 있는 자유아시아 방송이라고 할 때 너무 반가워서...그 때는 정말 처음으로 한국말을 듣고 반가워서 또 막 한국에 가고 싶었던 때였는데 결국 보험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나를 도와준 셈이죠. 그 사람이 그 이름으로 휴대전화를 사주어서 연락이 된 거에요.

질문:
편지도 쓸 수 있었고요.

정: 네 그 후로 빨리 빨리 돈을 벌어서 한국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7월까지 했어요. 대학가라 8월은 방학이라 나 혼자 했어요. 한국 김밥하고 냉면, 돌솥 비빔밥 등 혼자 할 만큼 사람이 왔어요.

질문: 중국요리도 하시고 한식도 하셨나요?

정: 아니 중국요리는 안하고 한국요리 한다고 중국어로 쓰고 한국어로 한국요리, 그 밑에다 어서 오세요, 라고 썼는데 이것도 일하던 주인아주머니가 도와주었어요.

네,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 들어야겠어요.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국음식 장사를 한 얘기를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정: 네, 감사합니다.

여성 시대에서 보내드리는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 지난해 초에 한국으로 입국한 정경화 씨의 얘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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