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도범죄

권은경· 북한반인도범죄철폐국제연대 사무국장
2017-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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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5일은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한반도가 해방된지 딱 72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식민지배를 당한 한국 사이에는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어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그리고 남한 사회의 여러가지 갈등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8일에는 일본의 미쓰비시라는 회사를 상대로 한국인 근로정신대 출신 할머니들이 제기한 소송 3건이 승소했다는 뉴스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소송은 남한의 광주 지방법원 민사부에 제기된 민사소송으로 80대 중후반의 근로정신대 강제노동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의 중기계 제작회사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입니다. 피해자들은 1944년 중반 경에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선전을 믿고 근로정신대에 지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희생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의 항공기제작 공장에서 엄격한 감시 아래 중노동에 종사를 했고 급여는 지급받지도 못했으며 외출도 금지 됐고 학교에는 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판부는 "옛 미쓰비시중공업이 침략전쟁을 위한 전쟁물자의 생산에 원고 등을 강제로 동원하고 노동을 강요한 행위는 당시 일본국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에 적극 동참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재판부는 미쓰비시중공업은 원고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배상할 책임이 있다며 원고들에게 1억원, 1억2천만원 등을 각각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72년 전에 자행됐던 불법행위인 강제 노예노동이지만 이를 기억하는 희생자가 생존해 있고 그리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법치가 통하는 세상이 오자 과거의 불법행위를 심판하게 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사한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가 이끌던 크메르루즈 정권이 저지른 반인도범죄를 심판하는 크메르루즈 재판소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캄푸치아 공산당 즉 크메르루즈 정권은 공산주의 이상사회를 만들겠다며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전국민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2백만 명 가량의 지식인과 학생 등 일반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이후 크메르루즈 정권은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1979년에 권력을 잃게 되고 정권이 교체됐으며 1999년에 크메르루즈는 공식적으로 해체됐습니다. 2006년에 캄보디아 정부와 유엔의 협력으로 크메르루즈 혼합재판소가 세워져 30년 전에 자행된 학살과 반인도범죄를 심판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에 누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과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은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시 독일 나치정권의 친위대원으로 아우슈비츠 유대인 집단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나치의 학살을 방조했던 94세 노인에게 독일의 한 지방 주법원이 5년 형을 선고한 일은 올해 6월 중순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렇게 1940년대 그리고 70년대 중반에 자행된 범죄인데도 지금까지 재판이 진행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의 기초인 로마규정의 29조에서 답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 관할권 내에서 자행되는 반인도범죄와 전쟁범죄 그리고 제노사이드라고 불리는 대량학살 범죄에는 시간적 유효기간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나라의 정부당국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의도적으로 조직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저지르는 잔혹범죄를 재판하는 상설재판소입니다. 이곳에서 다루는 범죄들은 시기에 상관 없이 재판을 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로마규정에 가입을 해서 재판관할권이 있는 나라에 해당되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북한 같이 로마규정에 가입하지 않은 정권이 저지른 반인도범죄를 재판하는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나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키면 북한당국이 저지르는 반인도범죄를 심판하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열릴 수도 있습니다. 즉 북한당국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저지르고 있는 조직적인 살해, 고문, 노예노동, 구금 시설 내에서의 비인간적인 처우, 납치 등은 몇 수십년이 지나서도 재판을 통해 언젠가는 죄값을 치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올해 4월 중순 경이었는데요. 해리 보든(Harry Borden)이라는 영국인 전문 사진작가가 인물화 사진첩을 발행했다는 기사가 생각이 납니다. 사진첩의 제목은 "생존자"였습니다. 보든 씨는 독일 나치정권이 유대인들과 유럽의 소수민족이나 장애인들을 계획적으로 죽이기 위해 설치한 집단수용소에서 생존해 가까스로 살아 나온 분들의 사진을 찍어서 사진첩을 발행했습니다. 200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십대 또는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에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책자의 사진 속 생존자들은 이제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주름진 노인의 모습만 남아 있었지만 이들의 눈빛과 표정은 아직도 어린시절의 아픔과 슬픔을 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남한에는 멀게는 20년부터 짧게는 몇 년 전의 아픔과 슬픔을 아직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3만이 넘는 탈북민들이 생존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에서 어떤 반인도범죄가 진행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제 해방 이후 72년이 지난 오늘날 72년 전의 사건으로 민사소송에 노예노동의 피해자가 승소해 배상금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왔습니다. 그리고 딴 나라들에서는 70년 훨씬 전의 범죄로 형사재판소가 가해자를 처벌하고도 있습니다. 현재 북한 땅에서 아직도 자행되고 있는 반인도범죄의 가해자들이 깊이 생각해 봐야할 역사의 교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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