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6.25의 증인 라우니 장군 영면하다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1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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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맘때이면 늘 다사다난했던 지난 해를 회상하곤 합니다만, 지난 해에 있었던 일 중 6.25 참전용사들이 잊지 못할 소식 한 가지는 12월 17일 에드워드 라우니(Edward L. Rowny) 예비역 중장이 향년 100세로 타계했다는 사실입니다.

6.25 전쟁 참전용사들에게 있어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을 측근에서 보좌하면서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했던 라우니 장군은 진정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라우니 장군은 1941년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종전 후 1949년에는 일본 도쿄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로 발령을 받아 맥아더 사령관의 군수기획 참모로 근무했는데,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일 맥아더 사령관에게 북한의 남침을 최초 보고한 당직장교였습니다. 이후에는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으로 인천상륙작전의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부터 참여했습니다. 그의 계급은 중령이었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그를 2계급 특진시켜 준장으로 진급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인천상륙 부대인 미 제10군단의 공병여단장과 군수책임자, 미 제2사단 제38보병연대 부연대장 및 연대장 등으로 참전하여, 1950년 12월 장전호 전투에서는 중공군에 포위된 미국 해병대 1사단과 미국 육군 7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공중보급을 감행했고, 국군·유엔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을 구출한 역사적인 흥남철수 작전에서도 맹활약을 했습니다.

강원도 양구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는 '1243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아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점령에 성공하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라우니 장군은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1969부터 1971년까지 한미연합사령부의 전신인 한미1군단 초대 군단장을 역임했으며, 1970~80년대에는 미국과 소련의 군축 협상에 관여하여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주도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 자문관으로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협상을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라우니 장군은 한국의 6.25 참전용사들과 전우애를 나누면서 말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는 2013년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은 악조건 속에서 추진되었지만 맥아더 사령관의 지도력으로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고 회고했으며, “전투상식대로라면 북한군에 포위된 경상도 지방을 지키기 위해 부산 지역에 증원군을 투입해야 했지만,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이라는 적군의 허를 찌르는 대담한 작전을 결행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라우니 장군이 1950년 겨울 장전호 전투를 떠올리면서 "혹한에 동상으로 숨진 병사가 중공군의 공격으로 죽은 병사만큼 많았다"고 회고했을 때 장전호 전투를 기억하는 한국과 미국의 예비역 군인들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듬해인 2014년은 라우니 장군에게 특별한 해였습니다. 그해 7월 27일 그는 휠체어를 탄 97세의 노인으로 한국에 와서 제61주년 6.25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여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그의 옆에는 전우이자 살아있는 6.25의 산 증인이고 다부동 전투의 영웅인 94세 백선엽 장군이 지켰습니다.

이날 한국 정부는 유엔군 참전용사 5 명에게 한국군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는데, 라우니 장군도 수상의 영예를 안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날 한국의 정홍원 국무총리는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에 힘입어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고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고, 라우니 장군은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신과 같은 한국과 미국의 할아버지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튿날인 7월 28일에는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자신의 6·25 참전 회고록(An American Soldier's SAGA of the Korean War)을 번역한 책 '운명의 1도'의 출판 기념회를 열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인이 모르는 6.25전쟁 비사들을 내가 죽기 전에 알리고 싶다”고 했던 평소 그의 소신에 따라 집필한 전쟁체험담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라우니 장군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그어진 38도선이 1도만 높은 39도가 되었다면 모든 것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면서 아쉬움을 표했고,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에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체결되던 순간까지 그가 몸으로 체험했던 생생한 기억들을 가감없이 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연주하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진실로, 라우니 장군은 6.25 전쟁의 전설이자 증거자였고 한미동맹의 산 역사였습니다. 한국의 참전용사들은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워싱턴에서 날아온 그의 별세 소식에 큰 슬픔에 잠겨야 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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