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과거 적국이었던 나라들과의 ‘전쟁의 역사’를 청산하는 순방외교를 펼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3월 20~22일 쿠바를 방문하여 88년 만에 쿠바를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는데, 미국과 쿠바가 1961년 국교를 단절한 이후 54년 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수교한 것은 2015년 7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랬던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5월 23일에는 베트남을 방문했습니다.
미국은 1964년에서 1973년까지 9년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참전한 미군은 연인원 300만 명에 달했는데, 그 중 5만 8천여 명이 전사하고 15만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82만 명이 귀국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미국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은 그토록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입고도 승리하지 못한 처절한 전쟁이었습니다. 베트남 종전 직후인 1975년 미국은 베트남에 대해 무기 금수 조치를 취했고 수십 년간 이를 유지했습니다.
그랬던 미국과 베트남은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은 없다는 고전적 진리를 입증하듯 1995년 수교를 재개했는데, 이는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성장,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 도서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베트남간 영토 분쟁,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고자 하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 등 국제정세 변화들이 가져온 산물이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증진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2000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그리고 2006년에는 부시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습니다. 2006년에는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하노이에서 팜반트라 베트남 국방장관과 회담하고 종전 31년 만에 양국간의 군사협력을 논의했으며 2014년 3월에는 마틴 템프시 미 합참의장이 하노이를 방문하여 베트남에 대한 무기금수를 해제하는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팜반민 베트남 외무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미국은 중국의 해군력 팽창을 의식하여 P-3C 해상초계기 등 해상안보 관련 무기를 수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이어서 2015년 7월에는 응웬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워싱턴을 방문하여 안보와 인권을 포함한 폭넓은 의제를 놓고 오바마 대통령과 회동했습니다.
이렇듯 양국 간의 협력증진이 이어지는 중에 베트남에 도착한 오바마 대통령은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 응우옌 티 낌 응언 국회의장, 응우옌 쑤언 푹 총리,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 등 베트남 지도부의 ‘빅4’를 잇따라 만나 양국간 관계증진 방안을 논의했으며, 베트남 국가주석과 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무기금수 조치를 전면 해제한다”고 밝혔습니다. 베트남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미국에 무기금수 조치의 전면적 해제를 요구해왔으며, 특히 중국 함정과 잠수함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레이더·정찰용 무인기 등 첨단무기들을 구매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번 오바마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으로 양국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미-베트남 간의 안보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경제협력 강화를 위한 조치들에도 합의했습니다. 양국은 베트남 등 12개국이 공식 서명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조기 비준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고, 베트남은 미 보잉사의 여객기 100대(113억 달러)와 프랫 앤드 휘트니사의 항공기 엔진(30억 달러)을 구매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미국은 그동안 베트남의 인권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왔지만,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군사긴장이 이어지면서 베트남과의 안보협력을 더욱 중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날아가 G-7정상회담에 참가한 뒤 5월 27일에는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헌화했습니다. 이렇듯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에 대해 52년 만에 무기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한 것이나 역사적인 히로시마 방문을 결행한 것은 적국이었던 이들과의 ‘전쟁의 역사’를 청산하고 급변하는 국제안보 정세에 대응하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오바마 행정부가 펼치고 있는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 전략' 또는 ‘재균형 전략’의 일부라 할 수 있습니다.
5월 23일 공식만찬에서 베트남의 꽝 주석은 "어제의 적이 이제 친구가 됐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는 싸우는 용기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용기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이를 지켜본 전문가들은 이제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중심기지였던 베트남 남부 캄란 만이나 중부의 다낭 지역에 미군이 다시 들어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