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당 7차대회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북한에서는 당 대회보장을 위해 주민들의 평양출입 봉쇄, 관혼상제 금지 지시를 하달하는가 하면 거리 곳곳에 설치한 구호와 그림을 지키기 위한 야간경비가 조직되고 평양주민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기 위해 지방의 보안원과 보위원들까지 평양에 불러올렸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수령은 인민을 믿고 인민은 수령을 우러러 받드는, 수령과 인민대중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일심단결에 대해 자랑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 반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수령이 참가하는 1호 행사에 대한 통제가 이렇게 심하지 않았습니다. 호위는 했지만 행사 참가자들에 대한 사전조사나 검열 절차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뇌부의 안전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행사에 참가하는 주민들에 대한 전수 검열 제도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김정일 등장 이후부터였습니다. 이때부터 북한주민들은 신원조회는 물론 신체검사까지 통과해야 1호 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도로 환영행사가 진행될 때에는 10만이 넘는 참가자들이 검열을 보장하기 위해 5~6시간 전에 행사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실수해서 늦거나 공민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거나 명단에 기록된 생일이나 이름이 공민증과 맞지 않는 경우에는 행사에 참가시키지 않았습니다.
1호 행사차가 지나가는 도로 주변 아파트 주민들의 주민등록을 검토하고 성분이 나쁜 사람들은 그곳에서 살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도 취했습니다. 그러고도 행사시에는 도로주변 아파트 주민들은 모두 집에서 나가도록 했습니다. 수령의 현지지도 시에는 공장 농장 군부대 할 것 없이 직접 만나는 인원으로 선발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강당에 몰아넣고 밖에 문을 잠그고 보초를 섰습니다. 현지지도 시간은 절대 비밀이다 보니 강당에서 나가지 못해 밥을 굶고 말뚝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김정은이 등장한 이후 이러한 통제는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2009년 김정은을 추대하는 당대표자회가 열릴 때는 외출금지령이 내려 평양 시내에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는 속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번 당 대회 역시 시작 전부터 경계가 삼엄하기 그지없습니다.
북한지도부는 주민들이 들고 일어날까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자본주의 나라에서 시위진압에 쓴다고 비난하던 최루탄과 이동경찰차를 비싼 외화를 들여 수입하고 시위를 막기 위한 기동경찰대를 별도로 조직했습니다.
주민들도 당과 수령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당과 수령에 대한 불평불만이 늘고 있고 말 반동에서 행동하는 반동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도로주변의 선전물도 안심하고 둘 형편이 못 되어 유화그림은 물론 구호판까지 밤새 경비를 서서 지켜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북한지도부는 통제강화의 원인을 제국주의자들의 음모에 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원인은 북한지도부의 정책실패에 있습니다. 북한지도부는 자기들의 정권유지만 생각할 뿐 주민들의 생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라경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부익부빈익빈만 심화되고 있습니다. 지도부의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주민들의 불만은 나날이 더 높아질 것이고 앞으로는 총이나 대포로도 주민들의 반항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