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은 체제를 달리하는 속에 분단을 더욱 고착시키게됐고 남쪽에서는 박정희로 상징되는 경제적 자립과 개발이 그리고 같은 기간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주체라는 명목으로 북한 주민들의 핍박과 북한 스스로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게됐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북한 주석 김일성을 통해본 남과 북의 지난 60년 변화를 이수경 기자가 조명해봅니다.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 사업, 그리고 7.4공동성명과 독재 체제 강화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은 서로 제갈길을 달리면서도 때로는 협조와 화해의 기운을 불러일으키기도하고 분단과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기도했습니다.
김일성은 소년시절 만주를 생활과 성장 공간으로 삼았으며 1930년대 부터 항일 운동을 펼쳤다고 북한은 선전 합니다. 북한 당국은 김일성 주석의 당시 항일 운동 경험을 지금까지도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교육의 기초로 써먹고있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독재 체제를 공고히하기위해 정치적 경쟁자라든지 정적들을 제거하고 남북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위해 주민들을 동원해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공고히 하려 애씁니다. 이과정에서 주민들은 집단 노동과 상호 감시체제 그리고 김일성 우상화속에 서서히 인권의 가치와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김일성과 그 체제에 희생당하게됩니다. 그러나 주민들에 대한 강한 통제와 말안듣는 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처벌 그리고 우리식으로 살자는 식의 집단 주의는 겉으로 봐서는 상당한 발전을 가져오는 듯 했다고 탈북자 김승철씨는 말합니다.
김승철: 그 때는 천리마 운동이 큰 효과 봤어요. 60년대 말에는 중동이나 동남 아시아의 열대 과일까지 수입해 먹을 정도로 생활이 좋았습니다. 식량 배급도 생필품도 자율 판매 할 땐데 상당히 공급이 좋았습니다. 60년대 중반에는 북한에서 식당에서 일하는 것은 챙피하다고 일도 안했어요. 당에서 강제로 시켜야 할 정도였죠.
그러나 북한의 경제 발전은 1960년대 말부터 심각한 내리막 길을 걷습니다. 러시아 북한 담당 외교관 출신인 게오르기 톨로라야 (Georgy Toloraya) 연구원은 북한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외부 세계와 고립된 체제적 한계 때문에 김일성의 경제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지적합니다.
Georgy Toloraya: When economy has reached some stage, you need some technology, you need some material from outside.
"경제가 어느정도 재건되고 난 뒤에 그 다음 단계에서는 기술이 필요하고 해외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 때부터 경제는 자본주의적 요소가 필요하게 됩니다. 1970년대 북한은 그것을 놓친 것입니다. 당시 북한은 자본주의를 철저히 배제하고 계속 노동자의 생산 의욕만 고취시켰습니다. 하지만 당시 노동 생산 능력 만으로는 북한의 경제 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없었던 것이죠.."
반면에 남한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남북 통일은 남한이 경제적으로 북한에 우위를 점할때 가능하다고 보고 경제발전에 매진합니다.
정부가 일일이 경제발전 계획을 챙기면서 기업과 국민들을 이끈 덕에 남한의 경제는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의 잿 더미를 디디고 세계가 놀란 경제적 기적을 일으킵니다.
국민들은 잘 살고 기업들은 수출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업적을 쌓았습니다. 박정희의 경제 정책은 남한이 지금처럼 잘살게 된 기반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위해 무장 공비까지 남쪽에 녀려보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내리고있다는 사실입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 관여했던 임동원 전 남한 국정원장은 자신의 대북 접촉을 정리한 '피스 메이커'라는 자서전 식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고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금수산 기념 궁전 참배를 요구하면서 자신도 서울을 방문하게 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겠다고 밝혔다"
“김정일 위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으로 정치 탄압을 한 것은 나쁘지만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고 경제개발을 하여 남조선을 발전시킨 데 대해서는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자신의 책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약속 한 대로 서울에는 내려오지않았지만 자기를 대신해서 서울을 방문한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임동옥 통일 선전부장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국립현충원을 참배토록 지시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비화가 됐습니다.
김일성과 박정희를 구분짓는 또다른 차이는 독도와 백두산이라는 민족의 역사적 경계와 영토를 지키는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박정희는 일본의 집요한 시비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지켰고 김일성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중국에 내줬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0년대 초 한일 협정이 물밑에서 논의되던 시기, 일본은 자국의 제약회사 신기술을 이전하는 댓가로 독도를 빼앗기 위해서 특사를 박정희에게 보냅니다. 박정희는 일본에서 온 특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부하들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아시오. 우리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요."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을 위해 죽기로 했다는 말 한마디로 독도를 지킨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 중국은 북한 주민들의 월경을 문제삼고 김일성에게 한국 전쟁을 댓가로 백두산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결국 1962년 북위 42도선을 경계로 백두산을 중국에 할양할 것을 승인하고 조중 우호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중국과 잘 지내기위해 백두산을 그냥 중국의 발 아래에 내준 것입니다. 김일성은 일본에 한반도를 빼앗기지않도록 하기위해 투쟁을 했다고하는데 민족의 출발지인 백두산은 단순히 중국과 잘 지내기위해 그냥 내준 것입니다.
지난 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격으로 사망했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는 그가 정해놓은 후계자도 그리고 그가 몰래 빼돌린 재산도 없었다고 언론들은 전합니다. 다만 박정의 전 대통령의 사망을 슬퍼하는 남한 국민들의 눈물과 그가 이뤄낸 남한의 경제 성장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북한 주민들도 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던 날 통곡했습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의 통곡 소리에는 앞으로 김일성이 남겨놓은 후계자 김정일 체제 아래서 살아갈 걱정이 담겨 있었다고 탈북자들은 말합니다. 탈북자 박상학씹니다.
박상학: 경제적인 문제가 제일 중요한 것이죠. 그래도 김일성 있을 때는 배급도 주고 굶어는 안 죽었거든요. 김정일이 통치하면서 더 빈곤해 졌다는 것이죠.
남과 북이 갈라진채 서로가 서로를 고집하면서 살아온 지난 60년대와 70년대 이유야 어쨋든 분단은 고착화됐고 남과 북을 이끌었던 박정희와 김일성 두사람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