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즐거운 나의 집

주말, 아침 일찍 친구 영숙이가 집으로 찾아 왔습니다. 오랜만에 남대문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좀 사기로 했는데, 출발 전에 저희 집에서 아침을 먹고 가자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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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향 친구 영숙이와 밥상 앞에 앉아있자니,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밥을 입에 넣다가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왔습니다. 영숙이는 밥 잘 먹다가 눈물을 흘리는 저를 보고 크게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그냥 고향 생각이 났다고 하니 영숙이도 이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탈북하기 전, 함북도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잠깐 평안남도 신성천 역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역 주변에 있는 장마당에 간 적이 있는데 40대 중반의 여인이 두 아이들과 함께 다리 밑에서 작은 모닥불에 냄비를 걸고 멀건 죽물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남조선 인민들이 남의 집 처마 밑이나 집 없이 다리 밑에서 헐벗고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교육을 받았는데 눈앞에는 헐벗고 굶주린 우리 인민들이 있었습니다.

아줌마에게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그 여인은 저에게 오히려 짜증을 내면서 어디서 왔는가고 되물었습니다. 평양이란 말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지방에 다니며 평양 사람이라고 하면 오히려 비난을 받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평양을 출발해 함북도로 가는 내내 너무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차 역 주변에 있는 아파트 건물의 창문이 하나도 없는 것을 제 눈으로 봤고 그 빈 집에 살던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에 못 이겨 굶어 죽거나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는 주민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현실'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국경 연선인 함북도는 더 처참했습니다. 웬만하고 쓸 만한 집들이 너무도 많이 비어 있었고 집 없이 장마당이나 기차역에서 밥을 빌어먹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함북도 무산이 고향인 영숙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장마당 길목이 좋은 곳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옆집에서 살던 사람이 당장 먹을 것이 없다면서 집을 1500원을 받고 팔고, 온 식구가 기차역에서 잠을 자며 떠돌이를 했다고요. 사람이 한생을 살면서 인간에게 있어서 큰 재산이 집인데 오죽하면 집과 국수를 바꾸어 먹고 둥지를 헐값으로 파는 주인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만큼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날아다니는 작은 날 짐승도 둥지를 만들어 놓고 새끼와 둥지를 목숨으로 지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개미조차도 눈 오고 바람이 부는 겨울이 오면 겨울 날 준비를 하고 비 오는 여름이 오면 장마에 대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법인데, 하물며 인간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여름철과 억센 눈바람과 추위가 오는 겨울, 허허벌판에서 추위에 떨고 더위에 지치는 내 아이들을 대책 없이 그냥 바라만 볼 수 있었을까요. 국가는 또 어떻게 이런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을까요. 저는 아직도 내 고향의 이 어려웠던 시절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숙이와 저는 이런 힘든 시절에 먹고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오는 길, 베트남에서 만났고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어려운 고비들을 함께 넘겼습니다. 그래서 우리 두 가족은 서로 가장 친한 친구고 친척이고 가족입니다.

영숙이가 식사를 다 마치고 말했습니다. 함북도에서 살 때는, 이런 내 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요. 저도 이런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오손 도손 가족을 꾸리며 살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인생은 돌고 도는, 어려운 시절이 있으면 또 좋은 시절 좋은 일들이 있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상을 치우고는 남대문 시장으로 갔습니다. 반나절을 돌고 돌았습니다.

친구 영숙이는 겨울 외투를 샀고 저는 신식 쫄대 바지에 남편의 신발도 샀습니다. 친구는 오랜 만에 남자의 물건을 사는 저를 가지고 농을 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더군요. 시장엔 겨울옷이 많았습니다. 바지 안에 두툼한 안감이 들은 바지부터 앞에 오리털이 잔뜩 들어서 눈밭에 굴러도 추울 것 같지 않은 오리털 잠바까지. 오늘도 고향과 삼국에서 따스한 둥지와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행방으로 헤매고 있을 내 고향 사람들에게 남대문시장 겨울옷을 몽땅 싸서 보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올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아야 할 텐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