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통신] 인민군 출신 탈북자 장철봉 씨 회견– “휴전선 남쪽에 자유가 있었습니다”

북한에 식량난이 찾아와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만 명에 이르던 무렵,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은 어느 인민군 병사가 있었습니다. 북한 최전방에 있는 민경부대 출신인 탈북자 장철봉 씨는 남측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남한 방송을 통해 휴전선 너머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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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7년 휴전선을 넘어 한국에 입국한 민경부대 출신 탈북자 장철봉 씨. (RFA PHOTO-이수경)

서울통신, 이 시간에는 탈북자 장철봉 씨를 만나보겠습니다.

할머니들의 손맛으로 유명한 밥집들이 많은 서울 종로 효제동의 뒷골목. 옹기종기 늘어서 있는 식당들 사이로 탈북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겨레 선교회’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난 1997년 휴전선을 넘어 한국에 입국한 민경부대 출신 탈북자 장철봉 씨가 그곳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도 탈북자들을 위해 할 일이 많다며 책상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장 씨는 새해 소망을 묻자 탈북자들이 제대로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제일 하고 싶은 일이 탈북자들의 정착을 돕는 중앙부처가 하나 생겼으면 좋겠고 저도 열심히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장 씨가 탈북자들을 위해 봉사하게 된 이유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서 얻은 자유와 풍요를 후배 탈북자들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한에서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여건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평양 출신인 장 씨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북한에서도 가장 대우가 좋다는, 휴전선이 내다보이는 최전방 민경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장 씨의 군대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민경부대는 포상 휴가를 제외하고는 휴가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 복무 중에 어머님이 사망했습니다. 휴가를 받지 못해 장교들과 싸우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체제에 염증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장 씨가 남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별도로 진행된 조사와 사상교육은 평생 그를 괴롭힐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북한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이 평양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중국에서 남한 노래가 건너와 남한 노래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를 들었는데 저는 그 노래가 북한 노래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병 훈련 오락회 때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군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장 씨는 휴전선 너머 남측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방송을 들으며 어쩌면 그곳에 자유와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휴전선을 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 전기가 흐르는 철책을 지나 지뢰밭을 건너 남쪽으로 가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쉬운 일이였다면 북한의 부대, 대대가 넘어 왔을 것입니다. 전기 철책도 있고 지뢰밭과 강과 같은 장애물이 많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목숨이 질겨 살아서 휴전선을 넘었다는 장철봉 씨. 그는 북한의 최전방 부대의 실상을 알리고 북한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쳐주기 위해 남한의 군 부대를 대상으로 안보 강연을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남한의 전방에 있는 부대를 돌며 안보 강연을 다녔습니다. 안보 강연을 가면 남한 군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북한군의 구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초소 근처의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를 하면 안되니까 보이지 않도록 주로 남쪽으로 끌고 가는데 남측 부대에서는 제일 잘 보입니다. 북한군의 구타를 목격한 남한의 군인들은 북한군의 구타가 너무 심하다. 저렇게 구타를 심하게 하는데 왜 탈영병이 없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남한군은 요즘 고참이 비 인격적인 요구를 하면 졸병이 울면서 집에 전화를 한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북한의 군기를 따라 잡을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은 장 씨. 장 씨는 남한에서 대학도 다녔고 사업도 했고 대기업 직장에서도 일한 경험도 있습니다. 장 씨는 남한에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마음이 늘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북에서 고생하고 있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시간이 갈수록 커져가기 때문입니다.

“북에 두고 온 여동생 하나가 있습니다. 명절 때는 남한에서 사귄 친구들이 모두 시골에 가고 그러면 연휴인 명절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외로움이 제일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남한에 잘 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게 살기 위해서 스스로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장 씨는 언젠가 만날 여동생 앞에서 떳떳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