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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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한반도 분단에 따른 아픔은 아직도 남과 북 곳곳에 존재합니다. 가장 직접적인 것이 전쟁으로 인해 땅이 갈라지면서 가족이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고 그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도 휴전과 함께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북한에 포로로 남게 된 겁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가장 힘든 광산과 탄광 일을 하는 국군포로와 그 가족에 대해 알아봅니다.

김현서: 그러니까 그 지역 사람들은 남조선 사람이다 괴뢰군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50대 초반의 탈북여성 김현서 씨의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자녀로 탄광일을 했습니다. 북한에서도 도시사람들은 국군포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주로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곳에 국군포로와 그 가족을 이주시켰기 때문입니다.

김현서: 벌써 북한에서는 우선 출신성분을 많이 봅니다. 그 나라를 유지해 나가자면 당에 충실하고 그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우대하다보니까 우리 부모들은 북한을 침략하기 위해 총을 들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자기들에게 총을 겨눈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다 잡아서 탄광, 광산 그리고 일제 때 쓰던 공장에 보내 사고가 나서 죽어 나가는 그런 곳에 국군포로를 몰아넣고 그랬거든요.

김 씨는 북한에서 억울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남들처럼 배울 기회가 없었고 나이가 차서 결혼을 앞두고도 배우자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태어날 때부터 남조선 집 자식이란 낙인이 찍혀 모든 일에 제약을 받았다는 겁니다.

김현서: 정말 우리는 부모가 국군포로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남조선 집 아이들로 불리면서 자랐는데 솔직히 출신성분이 좋은 아이들은 학교 때부터 선생님이 대하는 것부터 달랐어요. 그런데 우리는 학교 때도 눈치를 보면서 살았어요. 공부를 잘해도 대학을 못가고요. 그리고 오빠가 있는데 오빠가 군에를 못가는 거예요. 북한은 어떻게든 군대 나가서 조선노동당에 입당을 해야 사람값을 인정받고 사회에 나가서도 한자리 하는데 남자가 당증을 못 내면 여자도 못 만나고 장가가기도 힘들어요. 10년 복무해 입당하자 하는데 국군포로 자녀는 군 입대가 안 되고 대학도 못갑니다. 그냥 졸업하면 바로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꼬깽이를 들고 땅을 파고 일해야 했어요.

국군포로 1세대인 당사자들은 이미 1953년 휴전과 함께 포로가 돼서 이후 북한 주민으로 편입이 되거나 전향하지 않아 43호 관리대상자로 따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감시대상자로 엄격한 신분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들이 결혼해서 북한에서 낳은 자녀들 또한 출신성분의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김현서: 지금은 다 이해하지만 자랄 때 부모 때문에 자기 앞길이 막혔고 배우지 못하고 남들 공부할 때 탄광 가서 땅굴을 파야한다는 생각에 부모를 원망했어요. 나는 왜 저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했죠. 그래서 심지어 아버지한테 빨리 죽으라고 왜 살아서 우리를 낳아서 우리에게 힘든 삶을 물려주는가 하고 엄청 원망을 했어요.

북한주민이 매일 귀가 아프도록 듣는 '대를 이어 충성하자'의 구호처럼 국군포로의 자녀는 대를 이어 아버지의 일터에서 그들의 자식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여기엔 예외가 없습니다.

김현서: 대대손손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탄광 광산은 사람들이 정말 일하기 힘든 곳이기 때문에 뒷배가 없는 국군포로만 거기서 일하고 그 자녀들만 일하게 되는 겁니다. 의무적으로 자식들이 부모의 자릴 이어 거기서 일해야 하는 거죠. 그 자리를 지켜야 되는 거죠.

남성은 국군으로 전쟁에서 포로가 됐지만 여성은 엄연히 북한에서 태어난 주민으로 가정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낳은 자녀는 씻을 수 없는 달리 표현해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살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마을을 형성하다 보면 그 중에는 특출한 능력을 타고 내어난 사람도 있을 법 한데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김현서: 전혀 없죠. 똑똑한 것은 의미가 없어요. 남조선 집이라고 낙인이 찍혀있기 때문에 절대 안 되는 일이죠.

가자: 무리 중에서도 똑똑한 사람이 있을 텐데 안 된다 말이죠?

김현서: 북한은 사는 집도 그렇지만 모든 것이 하나 건너 간첩이기 때문에 같은 출신성분이라도 옆 사람을 믿지 못해요. 입만 잘못 놀려도 하룻밤 자고 나면 없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두려워하거든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얘기를 못하는 거죠. 나 혼자면 괜찮은데 일가를 몽땅 없애버리니까.

1970년대에서 1980년까지 일반 사람들이 배급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은 북한도 살만 했다는 말을 합니다. 어찌 보면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북한이 남한보다 살기 좋은 때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국군포로 가족은 풀 뜯어다가 풀죽을 쑤어먹고 칡뿌리를 먹으면서 연명했다고 김 씨는 말합니다.

김현서: 우리가 어릴 때 일반 사람들보다 노동을 더 하기 때문에 하루 900그램을 줬어요. 학교 다니는 아이는 300그램이고요. 오직 쌀만 바라보는 그 나라에서 오직 그것만 먹고는 살수가 없는 일이거든요. 김일성 시대 배급을 줄 때도 그것만 가지고는 어림없었어요. 아버지가 밤에는 나가 일하고 낮에는 잠을 못자고 배낭을 메고 깊은 산에 들어가 칡뿌리를 캐서 먹고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어다가 옥수수쌀에 도토리 넣어 해먹고 칡뿌리 씹어 먹으며 살았던 기억이 나거든요.

김현서 씨는 15세정도 됐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빨리 죽으라는 몰아세우며 원망합니다.

김현서: 어느 날 널판자로 만든 궤짝이 있는데 거기에 두꺼운 책이 나오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아버지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써놓은 거예요. 그것을 감춰놨더라고요. 앞장 몇 장 보다가 내가 무서워서 안보고 그냥 다시 넣어 뒀죠. 그 다음부터 아버지를 더 원망했죠. 너는 괴뢰군이구나. 나는 어째 저 괴뢰군의 자식으로 태어났을까? 이러면서 내 자신을 원망하고...

탈북해서 남한으로 돌아간 국군포로 귀환 1호는 1994년 남한에 간 조창호 소위입니다. 2013년 고인이 된 조창호 씨는 남한에 가서 중위로 전역 했고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가 수 백 명이 된다고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장진한, 양순용, 장수환 씨 등 16명이 탈북해 남한에 가면서 정부는 1999년 "국군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기에 이릅니다. 북한 전문가 이훈 씨입니다.

이훈: 조창호 중위를 포함해서 양순용 씨와 그 이후에 오는 분들의 증언을 조사해서 분류하는데 일단 명단을 작성해요. 이름만 가지고 하진 않고 여러 자료를 가지고 중복성을 찾는 거죠. 참 희한한 것은 그분들이 연세가 고령인데도 어디서 근무를 했고 군번이 뭐라는 것을 다 기억해요.

김현서 씨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암으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김 씨에게 남긴 유언에 따라 탈북해 남한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의 현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