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정일의 평생 단 한번 공개사죄

장진성∙탈북 작가
201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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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왼쪽)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가 지난 2002년 9월17일 평양에서 만나 악수하는 장면.
사진-연합뉴스 제공
2000년 초 평양에선 고이즈미 일본 전 총리의 방북 계기로 북일 수교 정상회담이 열립니다. 북한은 그 수교 정상회담을 통해 많은 경제적 이익을 챙길 것이라며 대대적인 선전을 했는데요. 그런데 오히려 북한과 일본 사이는 더 악화되었고, 조총련마저 해체위기에 몰리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통일 전선 부에서 근무하며 통전부가 작성한 그 전후 과정의 내부 보고서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북일 수교정상회담이 진행되게 된 것은 일본과 북한이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북한의 목적은 크게 여섯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일본으로부터 과거 사죄와 식민지 배상을 받아낼 수 있는 정치, 외교적 계기와 전환점을 마련하려고 했고, 둘째는 고이즈미 총리 방북을 양국의 정치 외교성과로 부각시켜 북한이 정권 차원에서 감행한 납치 범죄를 축소하려고 했습니다. 셋째는 수교 정상화와 함께 일본이 제공하는 막대한 외화로 북한 내 경제난을 회복하려고 했고, 넷째는 일본과의 수교정상화를 성사시켜 자주적, 독립국으로서의 권위와 지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다섯째는 일본 내 조총련의 지위와 권위를 강조하려 했고 마지막으로는 일본과의 수교로 미국과 남한의 반 북 정책을 고립시키려고 했습니다.

통전부가 분석했던 일본의 목적은 크게 다섯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대내외 악재들에 직면한 고이즈미 내각이 지지율 반전의 창구를 납치문제 해결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보았고, 둘째는 납치문제에 있어서 구체적 제안보다 정권차원의 사죄와 반성을 받아내는데 주력하여 고이즈미 내각의 지지율 반전 계기로 활용하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셋째는 일본에 가장 적대국인 북한 정권을 대담하게 포용 함으로서 일본의 유엔이사국 진출 국제환경을 유리하게 만들어보려는 것이고, 넷째는 반일정서가 짙은 남한을 자극하기 위한 북한 끌어안기 전략으로, 그리고 다섯째는 미사일 발사시험과 같은 북한의 군사적 행동에 대해 경고를 하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북한과 일본이 실무회담에 마주앉고 보니 입장차이가 굉장히 컸습니다. 우선 북한은 국교관계 정상화, 식민지 배상금 지불을 전제로 납치협상 및 정상회담을 제안한 반면, 일본은 납치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하는 정상회담과 경제지원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북한은 일본의 과거 사죄와 그 연장선에서 식민지 배상금 지불에 대한 공개선언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과거 사죄는 가능하나 배상금 지불이 아닌 국교관계 정상화 명목의 경제 지원을 고집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납치 문제에 대한 개별, 관계 부서의 반성과 사죄, 처벌은 가능하나 정권 차원의 공식적 입장 발표는 불허했고 일본은 과거 공개 사죄와 북한 정권의 납치범죄 공개 사죄를 맞바꾸는 식의 양국동시반성을 제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은 국교정상화 및 과거 배상금 지불 이행과 감시를 위한 북한, 일본 주재 공동 사무실 개설을 요구한 반면. 일본은 납치인 생존자들의 전원 송환과 그 원만한 해결을 위한 일본-북한 공동 납치사무실 개설을 요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현금 중심의 경제지원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물자 중심의 경제지원을 고집했습니다. 그 실무회담 과정에 여러 일화들도 많았습니다. 북한 측은 정권차원의 범죄를 부정하고 납치에 개입한 개별, 혹은 관계부서들의 사죄와 반성을 공개, 또는 비공개로 하겠다며, 이마저 거부할 경우 회담을 결렬시키겠다고 협박했는데 당시 통전 부를 비롯한 대남공작부서들은 부분적 인정도 인정이기 때문에 김정일의 권위와 연계시켜 외무성의 실무협상 발언 자체를 심각하게 문제 삼았습니다. 일본의 협상기술에 탄복할만한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북한이 배상금 400억 달러에 대한 근거로 북한이 식민지 통치기간에 수탈한 금액과 그 이자를 계산한 결과라고 하자, 일본 측은 발전소, 제철소, 철도, 등 식민지 산업시설을 북한이 지금까지 무단 사용한 비용을 지불하라고 맞대응 하였습니다. 결국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의 경제지원 금액을 114억 달러로 잠정적 합의를 이루었고, 북한은 이러한 정상회담 대가비용을 김정일에게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통전부는 6.15 남북정상회담 대가비용을 먼저 받아낸 실적을 자화자찬하며 외무성의 협상결과를 평가 절하했습니다. 또한 북한 측은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8월로 요구했는데 이는 일본과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향후 제2의 8.15패전으로 선동하려는 정치적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계속 현금지원을 주장하자 일본 측은 현금지원 할 경우 독재국가 및 북 핵 지원 검증으로 미국이 개입할 명분을 준다며 물자지원의 필요성과 전망을 북한에 설명했습니다. 이어 일본은 과거 사죄와 식민지 배상 명목의 현금지원은 남한을 비롯한 다른 아세아 국가들의 재협상 요구로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라고 설명하여 마침내 북한의 동의를 얻는데 성공했습니다. 실무회담 결과를 받아본 김정일은 대 만족해 사회과학원, 인민경제대학 등 경제기관들에서 114억 달러 규모의 경제지원금으로 북한 경제 재건을 위한 다양한 특별사업 들을 기획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 연구의 목적은 확대생산적인 수출경제 건설보다 자급자족의 경제기반 구축이 더 컸습니다.

특히 김정일은 경제 재건 중심사안으로 전국 복선 철도 현대화를 꿈꾸었습니다. 한편 일본 정부를 압박할 목적으로 신문, 방송, 강연들을 통해 일본의 과거 식민지 통치 기간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대일심리전을 전개했습니다. 그 중심에 있던 통전 부를 비롯한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은 납치주제의 협상 자체가 불행이라며 향후 전개될 국제적 파장을 매우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자기의 독재습성대로 일본 내각의 최고 권력자인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성사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이자 성과로 인식했고 외교부에 추진을 압박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의 기대와 달리 정상회담은 처음부터 정권 차원의 납치공개 사죄와 반성을 전제로 하는 외교자존심 싸움이 되었습니다. 김정일을 더욱 당혹하게 만든 것은 고이즈미 총리 일행 중 일부가 숙소에서 북한 정권의 공개사죄 거부에 강하게 항의하며 고이즈미에게 정상회담 취소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내용의 도청자료를 받고 나서였습니다. 훗날 그 주인공이었던 아베 국장은 일본의 내각총리가 되었습니다. 김정일은 회담이 결렬되면 일본이 약속했던 114억 달러의 막대한 외화를 놓친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하여 오전 회의를 마치고 휴식 후 다시 속개된 오후 정상회담 자리에서 김정일은 즉흥적인 결심으로 납치범죄를 인정하여 북한 권력층들을 경악케 하였습니다,

이렇듯 김정일의 공개사죄는 북한 권력층 누구도 알지 못했던 돌발적 상황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회담 이후 당선전선동부의 지시를 받은 북한 공영TV방송들은 김정일이 납치문제를 인정했다는 보도자료들을 서둘러 쏟아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일의 신격화 사전에는 사죄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언론들은 ‘사죄’라고 했고 북한은 ‘인정’했다는 보도를 발표하게 됩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돌아간 후 북한 정권은 김정일의 결단력과 외교력을 극찬하는 당 강연 자료들을 쏟아냈습니다. 통전 부에도 외교부의 대일 회담성과를 참고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발간한 대내참고자료 책자가 직원들에 한해 보급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북일 정상회담 결과는 정 반대로 비참했습니다. 김정일의 공개사죄가 일본 내 반 북 여론으로 확산되면서, 114억 달러가 아니라 그동안 북한의 금고역할을 했던 조총련마저도 일본 국민들의 압박으로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상당수 조총련계 교포들도 북한 공민권을 포기하는 현상이 이어졌습니다. 김정일은 평생에 단 한번 공개적인 사죄를 한데 대한 치욕을 못 참아 외교부에 분노했습니다. 더구나 반 북 여론을 무마시키려 일본 방문을 허락했던 납치일본인 5명까지 귀국을 포기하자 김정일은 “외무성은 단순한 결과주의자들이다, 전략은 없이 희망만 믿고 일하는 안일한 부서다.”라며 질타했습니다. 하여 김정일은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 여론의 영향력과, 일본-남한 납치 연대 가능성을 제기하며 납치협상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던 통전 부를 재평가했고. 외교도 공작이라며 외무성에서 대남공작부서들로 납치문제 주도권을 이양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그때 김정일은 6.15남북정상회담처럼 사전에 대가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한 일본과는 두 번 다시 정상회담을 기획하지도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부터 강관주를 중심으로 하는 당 대외연락부의 대일 공작 팀이 재 가동됐고, 통전 부는 조총련과 56연락소 기지들을 동원한 대일 심리전을 전개했지만 아직까지도 북한과 일본과의 관계는 납치문제 암초로 침체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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