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정서에 세뇌된 북한 주민

장진성∙탈북 작가
2013.09.03
nk_asics_shoes-305.jpg 평양 소재 류원신발공장에서 새 형태의 신발을 생산했다고 소개한 제품이 일본의 스포츠 브랜드인 ASICS의 디자인과 매우 비슷하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북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친일정서에 대해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계는 북한이라면 항일경력을 내세워 지도자가 된 김일성의 지배를 받는 철저한 반일정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씨 신격화의 나라인 북한에선 의아하게도 주민들이 친일주의에 세뇌돼 있습니다.

북한 아이들은 가위바위보 놀이를 할 때 "쟝켕뽕"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 일본어입니다. 그런데 일본어인 줄도 모르고 옛날 때부터 내려오는 민속오락문화 용어로 알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일상용어에서도 일본어가 많습니다. 리어카를 '구르마'라고 하고, 접시를 '사라'라고 하며 셔츠를 '샤쯔'라고 합니다. 아마 주체의 나라인 북한에서 정권이 아무리 통제하려고 해도 안 되는 주민들의 외래어 언어관습이 있다면 거의 일본어일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의 36년 통치에 의한 식민진 자재가 아닙니다.

뜻밖에도 김일성의 주체적인 민족 우월주의 정책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 주민들은 일제 통치의 36년 식민지역사에 대해 누구나 민족적 수치감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적대감을 갖고 있을 때였습니다. 미국이나 남한보다 더 뿌리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북한 땅에 때 아니게 일본으로부터 거대한 "민족대이동"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근 10여 만에 달하는 재일교포들의 북송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준비를 서둘렀던 김일성 정권이나 순수한 민족애로 환영한 주민들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그 재일교포들의 입국이 북한 내 영구이념이었던 반일정서를 허물어 버리는 중대한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었습니다. 그때 북한 정권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향한 그들을 내세워 체제홍보에 열을 올렸습니다. 겉으로는 김일성의 민족우월주의정책 선전에서 많은 이득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재일교포들이 갖고 들어간 일본의 상품들은 북한 주민들에겐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외계세계의 물건들이었습니다. 김일성의 사회주의라면 무엇이나 다 세계 최고인 줄 알았던 주민들이 일본의 선진화를 엿보게 된 것입니다. 재일교포들을 본인 의사나 출생지에 따라 북한 전역에 거주시킨 결과 "자본주의 체제는 썩었지만 적어도 상품만은 멋지게 만든다."는 공감이 전역으로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순식간에 북한은 "made in Japan" 열풍에 지배됐습니다. 재일교포들이 버린 상표나 포장지를 주워 집 안에 보물처럼 전시하는 유행이 전파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일본 상품의 특권을 누리는 재일교포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 북한의 중산층으로 확실히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 상위계층은 상품의 선진화만이 아니라 일본문화도 주도했습니다. 인사예의와 언어, 품성, 심지어 식습관까지 재일교포들의 모든 행태는 확실히 남들보다 부드러웠고, 여유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북한 내에서는 충성의 대가로 얻는 신분상승이란 지극히 평범해 보였습니다. 하여 일본에서 상품을 보내오는 친척은 없지만 대신 문화의 모방으로라도 중산층의 품위를 획득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됐습니다. 그 변화를 결코 아이들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우리 일가친척 중에는 왜 일본에 도망 간 사람이 없었냐고 어른들에게 불평을 부릴 정도였으니깐요.

북한 정권은 김일성의 반일업적을 내세우는데 주민은 거꾸로 친일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조총련의 식민지로 예속된 셈입니다. 이는 주입 식 전체주의를 이탈하는 금기의 전체주의, 정서적 전체주의 반란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옷도 단체복을 강요당하는 주민들에게 자가용 승용차는 꿈도 꿀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재일 교포들에겐 그 특권이 허용돼 있었습니다. 텅 빈 평양의 도로 위로 질주하는 재일교포들의 자가용은 북한 주민들의 눈엔 단순히 차가 아니었습니다. 정권의 호각에 따라 똑같이 발을 맞춰 대열 지어 가야만 하는 속절없는 자기 운명의 재발견이었고, 그래서 충성의 회의심이었습니다.

8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계획경제가 흔들리면서 당 경제가 조총련 기업들에 의존하게 되면서부터는 재일교포들의 사회적 지위가 더 높아졌습니다. 정권이 본의 아니게 친일사대주의를 하게 되면서 주민들의 친일추세도 더욱 합법화 됐습니다. 김일성 사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 때에는 충성을 고집하던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는 반면, 일본 상품을 갖고 있었던 재일교포들의 풍족함은 더 돋보이게 됐습니다. 그래서 재일교포들에 대한 북한 정권의 시기와 통제도 심했습니다.

내부적으로 자본주의 경험자들인 그들을 동요계층으로 분류하고 간부등용이나 승진도 엄격히 제한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김정일의 지시로 재일교포들이 흰 색 자가용 승용차를 못 타도록 법적으로 막기도 했습니다. 이유가 유치하게도 일장기 색깔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 강연회에서 간부들은 이런 주장도 했습니다. "일본이 전 세계에 흰 색 차만 수출한다. 그리고 자기 나라는 빨간 색 차를 고집한다. 그 목적이 일장기를 전 세계에 그리고 자기 나라는 그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한마디로 재일교포들을 내국인처럼 믿지 말라는 공개적 경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에서는 김일성의 항일업적과 연고를 강조하는 "백두산줄기"보다 재일교포들의 "후지산줄기"에 대한 동경이 여전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에선 조총련의 약화로 "후지산줄기"보다 한국드라마가 가져온 "한라산줄기"가 더 강세가 됐습니다. 제가 남한에 와서 보니 한국에는 일본이란 나라가 "가깝고도 먼 나라"인데 북한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입니다. 이는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로 더 당당해 진 반면, 북한은 독재에 묶여 더 굴욕적으로 변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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