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3대세습은 핵 세습

장진성∙탈북 작가
201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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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ke prevent 305
사진은 2006년 11월 평양시 보통강 구역에 핵실험 성공을 환영하는 구호판이 설치돼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오늘은 북핵에 대해 말씀 드리하겠습니다. 북한의 핵 야망은 6.25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무기가 없어 한국전쟁에서 패했다고 생각한 김일성은 핵무기만 있으면 미국이나 유엔군의 참전을 막고 쉽게 적화통일을 할 수 있다고 타산했던 것입니다. 하여 1955년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한 북한은 1956년 소련과 핵에너지 평화 이용 협력협정’을 맺게 됩니다.

당시 소련은 북한의 핵무기화를 허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기는 공산주의이다.”라는 레닌의 전력전략 연장선에서 이 같은 핵물리협정을 맺게 됐습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전력기술이었던 셈입니다.

같은 해 북한은 핵물리학자 30명을 소련의 ‘드브나(Dubna) 핵 연구소’에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110㎞ 떨어진 드브나 시(市)에 세워진 이 과학기지에는 소련 최대 핵 실험실이 있었습니다.

‘중국 핵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핵 물리학자 왕감창 등 중국의 주요 핵과학자들도 이곳에서 길러졌습니다.

그들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1964년 중국은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키게 됩니다.

당시에는 소련과 중국과의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중국은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핵무기로 견제할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련과 중국의 두 핵강대국 짬에서 김일성의 핵야망은 더 커지게 됐습니다.

1955년 연구소 설립 이후 북한은 1990년 러시아와의 과학연구 협력이 중단될 때까지 30여 년 동안 모두 250여명의 북한 과학자들을 드브나 과학기지에서 연구하게 했습니다.

남한에서 박정희정부가 핵 개발을 하게 되자 김일성은 남한보다 먼저 핵무기를 갖기 위해 1960년대부터는 핵물리 연구진을 자체적으로 길러내기도 했습니다.

1962년 평북 영변에 실험실 규모의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데 이어 김일성종합대학과에 물리학과를 설립해 핵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하게 했습니다.

1965년에는 영변에 소련의 도움으로 IRT-2000 연구용 핵반응로를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북한의 핵연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1979년에는 자체 기술로 실험용 핵반응로 건설에 착수해 1986년 정식 운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1985년에는 영변 핵시설에 사용한 핵 연료봉을 써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실험실 건설에도 착수하게 됩니다.

북한의 초기 핵 연구는 도상록(都相錄), 한인석(韓仁錫), 이승기(李升基) 등 월북 과학자들이 주도했습니다.

일본 교토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도상록(1903~1990)은 해방 후 서울대 교수를 지내다 1946년 5월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과 주임을 맡았습니다.

한인석은 해방 후 연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월북한 뒤 김일성종합대학 고급 교사를 맡았으며, 모스크바에서 장기간 첨단 물리학을 배우고 돌아와 1960년대 대량의 핵물리 관련 논문을 발표한 인물입니다.

전남 담양 출신인 이승기는 1939년 교토대학에서 응용화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과대학장으로 재직 중 6.25 때 월북했습니다.

1940년대 초반 석탄으로부터 합성섬유 1호를 개발한 그는 1961년 비날론 생산을 주도했고 1967년 영변원자력연구소장과 1987년 과학원 함흥분원장을 지내는 등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처럼 김일성은 월북 박사들을 군사적 목적에 동원시켰고 또 그들의 이론적 자산을 토대로 핵무기화에 노력했지만 소련과 중국의 반대로 대놓고 핵실험을 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화가 노골화 단계에 진입하게 된 것은 김정일의 유일지도체제 기반이 강화되면서부터입니다.

사회주의 동구권 붕괴에서 충격을 받은 북한 정권은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핵무기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으로부터 보다 핵개발을 다그치게 됩니다.

하여 김정일의 지시로 1990년대 초반 거액을 들여 러시아에서 핵과 미사일 기술자들을 북한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북한은 김정일 정권에서 시작된 핵실험을 김정은 정권 들어와 3차까지 이어오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핵무기는 첨단기술이 아니라 50년대 이미 모든 원리가 밝혀진 기술입니다. 원자로 기술과 핵무기 기술은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동일한 분열 핵물질을 사용해 원자로는 3년 정도의 장기간에 걸쳐 핵분열이 일어나도록 작동시키는 반면, 핵무기는 짧은 시간에 핵분열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분열시간의 조절기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거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한 핵무기 개발 시 설계된 모형에 대한 핵계산을 현대와 같은 대용량의 슈퍼컴퓨터로 계산하지 않고 수기식 계산으로 개략적인 계산을 하여 설계했으나 특이한 문제점은 없었다고 합니다.

북한도 이미 1980년대부터 자체 기술로 영변의 5MWe 원자로를 설계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모형의 핵물질에 대해서도 정확히 묘사, 계산 가능한 핵계산 코드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상의 문제점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이설(異說)들이 있을 수 있으나, 컴퓨터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핵실험의 필요성은 과거에 비해 상당부분 감소됐으며, 컴퓨터 가상 실험을 통해서도 핵무기를 유지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 적지 않은 핵과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북한 정권의 선전대로 북핵이 북한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과거 소련은 미국과 대결할 만큼 강대한 핵 보유국이었지만 사회주의 해체를 스스로 선언했습니다.

이번에 3차 핵실험에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물론 북한의 우방인 중국조차도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대북제재를 공식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핵 때문에 유지되는 체제 같지만 사실 핵 때문에 고립과 제재로 자멸할 북한 정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국내외에 보여줬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장진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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