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반열에 올랐던 김평일의 추락 (2)

김주원∙ 탈북자
2017-03-07
이메일
댓글
공유
인쇄
  • 인쇄
  • 공유
  • 댓글
  • 이메일
주폴란드 북한 대사관 모습.
주폴란드 북한 대사관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정남의 피살사건을 놓고 북한과 말레이시아 관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김정남 살해사건에 가담했던 북한 국가안전보위성 요원들의 사진까지 모두 공개했습니다. 김정일의 맏아들 김정남의 살해가 북한의 소행임이 밝혀지자 국제사회는 김정은 정권을 규탄하는 목소리로 들끓고 있습니다. 고모부 장성택 처형에 이어 맏형 김정남까지 살해는 김정은의 만행은 김정일의 후계과정과 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세계의 이목은 김정은이 권력유지를 위해 다음에 숙청할 대상이 누구인지에 쏠려있습니다. 북한 전문가들 속에서는 김정은의 다음 숙청대상이 핀란드 주재 북한 대사로 파견돼있는 김평일이 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김평일은 김정일 시대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기득권층에서 대안세력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전 시간에 이어 김일성의 후계 과정에서 얽혔던 김정일과 김평일의 권력 암투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1969년에 열렸던 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가 김정일의 선동에 넘어간 김일성 계열 빨치산 출신들의 반란이었다는데 대해 전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4기 4차 전원회의로 김평일의 편에 섰던 안길 계열 빨치산 출신들이 제거됐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후처 자식인 김평일이 남아있는 한 김정일에게 후계자 자리가 차례진다는 어떤 담보도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김정일은 1974년 2월 “당 사상 사업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내놓았습니다.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김일성 빨치산 출신들의 모의는 1968년 4월 22일에 개최된 노동당 제4기 17차 전원회의에서 공개됐습니다. 당시 내각 제1부수상이었던 김일이 전원회의 보고에서 처음으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언급했습니다. 당의 유일사상체계에 대해 김일은 “혁명수행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멀리 내다보는 정치적 수령의 사상으로 전당이 무장하고, 그에 기초하여 모든 당원들의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 밑에 혁명을 해 나간다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렸습니다.

다시 말해 ‘당의 유일사상’은 곧 김일성의 사상이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은 김일성의 사상을 종교 교리로 체득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또 김일성의 사상을 종교화하려면 ‘당중앙’으로 불리는 후계자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김일성 계열의 빨치산 출신들이 갑작스럽게 ‘당의 유일사상’을 꺼내든 원인은 1967년 국내인민해방동맹 출신인 ‘갑산파’의 숙청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갑산파’의 거두들인 박금철과 리효순, 김도만은 김일성의 스탈린식 독재에 강력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을 배후에서 든든히 후원한 인물은 다름 아닌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였습니다.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던 김영주를 등에 업고 ‘갑산파’가 권력쟁탈전에 나섰으나 최현과 같이 군부를 장악한 김일성 계열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갑산파’가 김일성 계열 빨치산 출신들에 의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숙청되면서 김영주가 바라던 후계자의 꿈도 물거품이 돼버렸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 계열 빨치산 출신들 속에서는 뭉쳐야 살아남는다는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됐습니다.

권력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구심점이 바로 김일성이었습니다. 인민군 당위원회 4기 4차 전원회의에서 안길 계열의 빨치산 출신들을 숙청한 이유도 결국은 권력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김일성 계열 빨치산 출신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김일성 빨치산 출신들에겐 자신들의 권력을 대를 이어 지켜줄 강력한 후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후계자는 김일성 일가 중에 김정일이 제일 적중했습니다. 김평일은 비록 김일성의 자식이긴 하나 어머니 편이 빨치산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김정일은 어머니 김정숙도 김일성 빨치산 출신으로 누구보다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김일성 빨치산 세력의 심중을 반영한 것이 1974년 2월 김정일이 내놓은 논문 “당 사상 사업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입니다. 논문에서 김정일은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을 ‘주체사상’으로 포장해 김일성의 이론으로 내놓았습니다. 김정일은 이 논문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우선적으로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까지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 세력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논문에 근거해 김정일은 1974년 2월에 열린 노동당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을 발표했습니다.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은 사실상 기독교의 ‘십계명’을 모방한데 불과했으나 김일성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준 김정일에게 더 없이 만족했고 김정일에게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조직 정비를 위임했습니다.

10대원칙을 통해 김정일은 김일성 계열 빨치산 출신들을 앞세워 자신의 적수들을 곁가지로 몰아 갈 수 있었습니다. 김정일이 김성애 일가를 곁가지로 무자비하게 쳐버릴 구실을 만들어 준 사건이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의 월권행위였습니다. 평양시당 책임비서였던 김성갑은 김일성이 큰 도서관을 짓겠다던 장소에 자신의 저택을 웅장하게 세웠습니다. 이 사실은 김일성 계열 빨치산 출신들의 분노를 샀고 김정일의 의붓어머니였던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을 쳐내는 기회로 됐습니다.

김정일은 그해 6월 평양시당 전원회의를 조직하고 김성갑의 월권행위를 ‘당의 유일사상 체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몰아갔습니다. 김성갑을 노동당 중앙위의 사상검토 대상으로 지정하고 뒤를 캐기 시작하자 줄줄이 범죄행위가 드러났습니다. 특히 김성갑 측근세력들이 저지른 횡령과 관료행위, 마약범죄는 유일사상체계의 첫째가는 숙청대상이었습니다. 김성갑에게 의지해 자식인 김평일을 후계자 자리에 올려 세우려던 김성애의 야심찬 계획은 이렇게 서서히 저물어 가게 되었습니다.

빨치산 세력들에게 밀린 김성애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자리까지 모두 내려놓고 권력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김평일을 후계자로 내세우려던 김성애의 꿈마저 완전히 좌절된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김평일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김성애의 모략은 더 교묘해졌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던 1976년 8월 18일 북한에서 소위 ‘판문점 사건’이라고 부르는 인민군의 도끼만행 범죄가 발생하면서 미군 병사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판문점 사건’으로 한반도에서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화약고로 변했고 북한의 편을 들던 소련과 중국마저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습니다. ‘판문점 사건’은 김일성이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사죄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던 김평일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학업중이던 1977년 인민군에 탄원해 단번에 군 지휘관으로 승진했습니다. 김평일에겐 군부에 세력을 구축할 조건이 마련됐습니다. 이런 상황이 제일 두려웠던 게 김정일이었습니다.

후계자 자리를 선점해야 했던 김정일은 주변 사람들을 대번에 휘어잡는 김평일의 수완이 두려워 수단과 방법을 다 했습니다. 그 한 가지 방법이 김평일을 외국으로 빼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김평일의 운명을 판가름할 시각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약속드리며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 (0)
  • 인쇄
  • 공유
  • 이메일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