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생애와 숨겨진 비밀

김주원∙ 탈북자
201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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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청소년 답사행군대원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출생지로 선전하는 백두산 밀영 고향집'을 방문하고 있다.
북한 청소년 답사행군대원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출생지로 선전하는 백두산 밀영 고향집'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 시간에는 김일성의 이름과 고향, 날조된 과거를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전 시간에 이어 김정일의 이름과 고향, 날조된 생애에 대하여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북한에 계신 지식인들, 대학생들은 누구나 한번쯤 김일성, 김정일의 생애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까운 사례로 북한 당국이 아직까지 우기고 있는 미국에 의한 6.25 전쟁 발발설을 꼽을 수 있습니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미국에 3.8선 일대에서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20일 경에 오산에서 ‘스미스 특공대’와의 전투가 미국과 처음 맞선 전투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미국이 먼저 북한을 공격했다고 선전하면서도 6.25 전쟁이 한창이던 7월 20일 경에 처음으로 미군과 전투를 치렀다는 앞뒤도 맞지 않는 선전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에 의한 8.15 조국해방 설도 그 중의 한가지입니다.

북한에서 태어나면 누구나 배워야 하는 “김일성의 혁명역사”에서 ‘조국해방작전’이라는 한 개의 장이 있습니다. 북한은 이 부분에서 8.15 조국해방이 김일성의 조국해방 최후진격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의 명령으로 1945년 2월까지 항일빨치산 부대들의 연합체인 ‘조선인민혁명군’이 간백산 밀영에 집결했고 그해 8월 김일성의 최종적인 명령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로 진공하며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이루어 냈다는 것입니다.

지성을 갖춘 북한의 지식인들에게 이런 거짓을 믿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간백산 밀영에서 조국해방 최종 명령을 내렸다는 김일성은 1945년 9월에 소련의 화물선 ‘뿌가쵸프’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몰래 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과 미국의 원자탄 투하로 일본은 생사기로에 놓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1945년 8월 15일 일본천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로 남아있던 우리나라와 동남아의 많은 나라들이 동시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김일성의 혁명역사가 이렇게 날조된 것처럼 김정일의 과거 또한 온갖 거짓으로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양강도 삼지연군 소백수 노동자구에 위치한 백두밀영의 고향집에서 출생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전에 빨치산 활동을 하고 중국과 소련에서 김일성과 친분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김일성은 물론 김정일 역시 생일에서 이름까지, 성장과정의 모두가 거짓과 왜곡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해외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김정일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알자면 1939년부터 일본군이 만주일대에서 벌린 '참빗전술‘이라는 대토벌 작전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1939년부터 시작된 ‘참빗전술’로 중국 동북에서 반일무장투쟁을 하던 부대들은 전멸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위기를 타개할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는 1940년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길림성 돈화현 소할바령에서 항일연군 지휘관회의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김일성이 조직했다고 북한 당국이 떠들고 있는 ‘소할바령회의’입니다.

소할바령회의에서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는 일제의 토벌에 맞서 기존의 대부대들을 소부대로 재편성할 데 대해 결정합니다. 또 빠른 시일 내에 일제의 발이 닿지 않는 소련의 원동지역으로 이동해 병력을 최대한 보존할 것을 지시하게 됩니다. 소할바령회의 결정으로 김일성은 1940년 10월 몇 명 안 되는 대원들과 애인 김정숙과 함께 소련의 변방에 위치한 하바롭스크주로 은신하게 됩니다.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중국공산당 동북지구당 서기 주보중은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장에는 1940년 음력 9월 23일에 김일성이 훈춘을 경유하여 소련국경을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일행은 16명, 그중에 1명이었던 김정숙은 김일성의 아이를 임신한지 8개월에 접어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김일성과 함께 동행했던 빨치산 여대원 서순옥의 회상록을 보면 그들은 소련국경을 넘자마자 불법월경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김일성 일행은 먼저 소련에 와있던 동북항일연군 사령관 주보증과 이조린의 보증으로 풀려납니다.

이후 김일성은 나라가 해방되기 전까지 소련극동군 ‘88특별저격여단’ 제1교도 영장으로,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게 됩니다. 주보중의 부인인 왕일지는 김정일이 자기의 딸과 같은 해인 1941년에 태어났다는 증언을 역사기록에 남겨 놓았습니다. 옛 소련의 문서들에도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하바롭스크주 바츠코예 어촌 마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 약칭은 ‘유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시절까지 ‘유라’로 불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선중앙방송은 1981년에 ‘지도자 동지의 40회 생일을 맞이하여’라는 특별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이때까지 김정일이 1941년생임을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2년 2월부터 북한은 김정일을 1942년생이라고 공식화했습니다. 고향도 이름도 생일도 가짜인 김정일의 생애에서 제일 막장극은 1986년부터 발견되기 시작됐다는 수많은 구호나무들이었습니다. 해방 후 빨치산이 나무껍질을 벗기고 구호를 새긴 나무는 ‘청봉숙영지’ 자리에서 발견된 것이 유일했습니다.

1937년 빨치산 여대원들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청봉 구호나무는 어른 두 팔로도 감싸지 못할 만큼 둘레가 컸고 일부 글자들은 나무껍질 속에 묻혀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을 찬양한 구호목들은 이와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도 양손으로 감쌀 만큼 작은 나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어 수명이 30년밖에 안되는 나무에도 김정일을 찬양하는 구호가 새겨져 세상의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이 외에도 김정일의 고향이 백두밀영이 아니라는 근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지금 양강도 삼지연군 못가에 항일빨치산들을 형상한 대형 조각품과 군상들은 197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만약 김정일의 고향집이 백두밀영이라면 1979년에 완공한 삼지연대기념비와 군상들에 김정일을 찬양하는 내용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에 열렸던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선포됐습니다. 한마디로 김정일의 우상화는 그가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화된 1980년 10월 6차당대회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인지 김정일의 생전에는 구호나무들과 백두밀영 고향집을 찾은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반면 김정일은 사망하기 직전인 2011년 8월 운신조차 힘든 몸을 끌고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하바롭스크주에 있는 부레야라는 곳을 찾았습니다. 이름도, 고향도, 생일도 조작한 김정일이 생을 마감하던 시기에 찾은 곳은 진짜 고향이 있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였습니다. 아마도 김정일은 권력을 위해 날조해낸 자신의 과거가 영원한 비밀로 남을 것이라고 장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북한 인민들의 머리위에 군림한 독재자 김정은 역시 1984년 1월 8일 원산초대소에서 태어났다는 자신의 출생과정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일성, 김정일과 함께 김정은이 조작해 낼 과거가 궁금한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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