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수리 사슴목장

김주원∙ 탈북자
201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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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운곡지구 종합목장을 현지지도 하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
평안남도 운곡지구 종합목장을 현지지도 하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나간 시간 저는 김일성 일가와 노동당 비서국, 정치국 위원들을 위한 북한의 아미산총국 산하 사슴목장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북한의 아미산총국 산하 사슴목장들 중에 양강도 삼지연군 녹수리에 있었던 꽃사슴목장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에는 만주꽃사슴과 붉은사슴, 말사슴, 우수리사슴 등 여러 종의 사슴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까지 북한의 개마고원, 백무고원 일대에서는 백두산 호랑이와 반달곰, 사향노루도 자주 발견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북한의 산림들이 황폐화되고 식량을 대체하기 위한 주민들의 무차별적인 밀렵까지 겹치면서 여우와 사슴, 호랑이와 반달곰, 사향노루, 수달과 같은 보호 동물들과 희귀동물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단순히 인간이나 자연에서 사는 동물들에게만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북한의 각 도소재지들에 있던 동물원들에서 먹이를 먹지 못한 동물들이 무리로 죽어 나갔고 지어 아미산총국 산하 사슴목장들까지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양강도 삼지연군 녹수리에 있던 꽃사슴 목장이 ‘고난의 행군’시기 피해를 입고 자취를 감춘 아미산총국 산하의 대표적인 목장입니다. 삼지연군 녹수리(鹿首里)는 주변의 산봉우리가 마치 사슴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됐습니다.

아미산총국 산하의 농장과 목장들은 모두 주민통제구역이어서 녹수리 꽃사슴목장도 일반 주민들의 통행이 제한되었습니다. 저는 녹수리 꽃사슴목장에서 사냥꾼으로 근무하던 친구가 있어 어느 정도 목장의 내부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녹수리 꽃사슴 목장은 크지 않았는데 사육관리원과 수의사, 인민보위대를 포함해 인원은 다 합쳐도 50명 미만이었습니다. 이곳 꽃사슴 목장은 1960년대 중반에 건설됐는데 1980년대 중반에는 꽃사슴의 개체수가 500마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녹수리 꽃사슴목장은 김일성의 생일 80돌, 김정일의 생일 50돌이 되는 1992년에 많은 사슴을 도살했습니다. 당과 군의 고위급 간부들에게 사슴고기를 선물하느라 도살을 마구 하면서 5백여 마리의 사슴은 2백여 마리로 줄었습니다.

녹수리 꽃사슴목장은 외부인이 들어오거나 사슴이 도망치지 못하게 울타리를 두르고 울타리 밖으로는 사슴이 빠져 나올 수 없는 넓은도랑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목장은 하루 24시간 삼지연군 보안서 소속 인민보위대원 16명이 교대로 지켰습니다.

16명의 인원으로 하루 8시간씩 근무를 서려면 한번에 5명씩 경계근무를 서야 하는데 목장의 규모로 봤을 때 역부족이었습니다. 특히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에 대량아사 사태가 시작되면서 녹수리 꽃사슴목장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녹수리 꽃사슴목장의 직원들에겐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 해도 배급이 꼬박 꼬박 차례졌습니다. 그러나 인접해 있는 포태종합농장 중흥분장과 보천군 청림리 협동농장은 시신을 묻어줄 주민들이 모자랄 지경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굶어죽으나 훔치다 죽으나 이판사판이라는 게 당시 주변의 농업근로자들 태도였습니다. 위기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이듬해인 1996년 2월에 있었습니다. 당시 주변 중흥분장 주민들이 식량을 대용하기 위해 사슴목장을 곁눈질 하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사슴을 중국에 넘기거나 사슴의 고기를 중국에 팔면 쌀을 살 돈을 꽤나 벌 수 있었습니다.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 목장을 지키는 보위대원들의 허술한 틈을 이용해 주변 농장 주민들이 침범했습니다.

이들은 2미터에 이르는 도랑에 이깔나무 판자와 낡은 문짝을 깔고 역시 2미터에 달하는 목장의 울타리를 일정한 구간을 톱으로 썰어냈습니다. 이렇게 뚫린 울타리의 구간을 통해 사슴을 훔쳐갔는데 그 마리수가 얼마인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더 큰 피해는 사슴을 훔쳐간 범인들이 넓은 도랑에 판자와 문짝으로 된 다리를 해체하지 않고 달아나 버리면서 발생했습니다. 울타리의 틈을 통해 빠져 달아난 사슴의 발자국들이 주변에 무수히 찍혔습니다. 사슴들의 판단력은 실로 놀랄만 했습니다.

도랑을 건넌 사슴의 발자국은 한번 주저하거나 흐트러짐도 없이 압록강과 이어진 산등성이로 향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세상을 구경 못한 사슴들이 어떻게 알고 중국을 향해 곧바로 뛰었는지 지금도 그 비결을 알 수 없습니다.

김일성 일가와 노동당 주요 간부들에게 육류를 공급하는 녹수리 꽃사슴목장이 털렸다는 소식에 양강도 검찰소와 보위부, 안전부(경찰), 그리고 삼지연 보위부와 안전부가 총동원됐습니다. 사냥개를 가진 제 친구가 맨 앞장에 서야했습니다.

하루 종일 뒤졌으나 사슴도둑은 나타나지 않았고 사냥개들도 그들의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날 사냥개가 범인들을 찾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변 중흥분장 사람들은 제 친구인 사냥꾼과 이웃들이고 너무도 가까웠습니다.

그 중에 누구라도 꽃사슴목장을 습격한 사실이 알려지면 가족들 전부가 몰살당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 6월부터 김정일은 중국에 밀수를 해 식량을 구입하려는 목적으로 전기선과 전화선을 자르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많이 목격한 제 친구는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짜낸 방법이 기르고 있던 두 마리의 사냥개 코에 몰래 식초를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식초냄새에 사냥개들은 범인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은 사슴은 불과 40여 마리정도였습니다. 이 사실이 중앙에 보고되면 양강도의 당 간부들과 사법간부들이 무사할리 없었습니다. 세월이 혼란되고 어수선한 때이다 보니 중앙에 거짓보고를 올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만큼 간단했습니다.

목장 책임수의방역사가 꽃사슴들이 구제역에 걸려 몇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는 거짓 조서를 꾸미고 여기에 양강도 당 간부들과 보위부 간부들이 잇달아 수표(사인)를 했습니다. 녹수리는 철길이 없어 중앙에서 일부러 확인하러 오기도 어려웠습니다.

구제역으로 사슴들이 다 죽고 몇 마리 남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목장을 폐쇄하고 혹시 구제역에 감염되었을지 모를 남은 사슴들은 양강도 간부들이 처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양강도 간부들에겐 황금넝쿨이 굴러들어 온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녹수리 사슴목장은 아미산총국에서 흔적을 지우게 되었습니다. 아미산총국 산하에서 벗어나 하루아침에 중흥분장 농업근로자로 전락한 이곳 직원들은 배급이 끊겼습니다. ‘고난의 행군’ 여파로 이들에게도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1996년 5월, 녹수리 꽃사슴목장의 직원들이었던 주민 3명이 외딴집에 모여 무언가 식량과 바꿀만한 것이 없는지 토의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구경하지 못한 이들은 당장 하루 이틀도 목숨을 부지할 형편이 못 됐습니다.

이런 마당에 양강도 혜산시에서 온 한 가난한 여인이 사탕을 들고 집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감자 전분을 빼낸 찌꺼기, 섬유질만 남은 ‘감자까리’라도 사탕과 맞바꾸려고 그 여인은 이집 저집 인기척이 없는 문을 열심히 두드렸습니다.

굶주려서 이성을 상실한 전직 녹수리 꽃사슴목장 청년 3명의 눈에 그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팔려는 사탕을 빼앗아 낼 목적이었으나 그녀가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급한 나머지 앞뒤를 분간할 새 없이 마당에 있던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여인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1996년 5월 9일, 양강도 삼지연군 녹수리에서 있었던 인육사건의 전말입니다. 김정일의 뒤를 이은 김정은은 몰염치한 선물정치와 이렇게 목숨을 바친 인민들의 피의 대가로 핵폭탄을 개발하고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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