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리 백도라지농장

김주원∙ 탈북자
2017.08.22
nk_opium_field-620.jpg 위성사진으로 찍은 북한 함남 요덕정치법수용소 경내의 아편 경작지.
사진-연합뉴스 제공 (폭스뉴스 화면 캡쳐)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도 1990대 북한에서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많은 아편을 재배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편재배는 양강도 보천군에서 처음 시작됐습니다. 1980년대 말,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자 사회주의 시장체계가 무너지면서 북한도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내몰렸습니다. 70년간 이어진 사회주의 이상사회 건설은 수많은 인민의 가슴에 상처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웃 국가인 중국은 일찍이 개혁개방의 길을 걸었던 결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혼란을 겪지 않고 공산당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사회주의 붕괴에서 교훈을 찾을 대신 민족 반역의 체제 유지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자 러시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해 옛 동구권 국가들은 여태껏 북한이 진 빚을 청산하라고 불같이 독촉했습니다. 중국 당국도 북한이 진 빚을 더 이상 미루지 못하겠다며 김일성 정권을 강하게 압박하고 나섰습니다.

그동안 김일성이 외치던 자력갱생 구호가 얼마나 공허한 타령이었는지는 북한이 처한 어려운 환경이 잘 대변해 주었습니다. 자력갱생 구호에 파묻혀 세계와 담을 쌓고 살던 북한은 발전소 설비 하나 제 손으로 만들지 못하는 후진국이었습니다. 외국에 진 빚을 갚기는커녕 당장 인민들을 먹여 살릴 길도 막막하던 때였습니다. 김일성은 체제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급해 맞은 김일성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아편을 재배하는 국제적인 범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이 아편에 호기심을 가지는 데에는 1989년에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영향이 컸습니다. 한국의 ‘88 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해 분별없이 행사를 요란하게 치루면서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재정은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서 개최되는 ‘88 올림픽’을 파탄내기 위해 김일성의 후계자였던 김정일은 대한항공 여객기 ‘KAL - 858기’를 폭발시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엔이 북한을 테러국으로 지정할 명분으로 작용했습니다.

여기에 북한이 의지해 오던 사회주의 시장마저 해체되면서 김일성은 사지로 내몰릴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더 이상 수수방관 할 수 없었던 김일성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외화벌이 수단은 국제사회가 엄중한 범죄로 규정지은 마약제조와 거래였습니다. 북한은 해방 후부터 모르핀과 아드로핀과 같은 마약 제조를 목적으로 함경남도 단천시에서 소규모로 아편을 재배해 왔습니다. 1980년대 북한 인민군 정찰총국은 이곳에서 재배된 아편을 국제범죄조직과 거래해 폭리를 취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외화원천이 부족했던 김일성에게 있어서 아편은 공짜로 억만금을 긁어모을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었습니다. 외화를 벌어들일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던 김일성은 1990년 1월 8일 국가적으로 아편을 재배할 데 대한 방침(구두지시)을 제시했습니다. 현재 북한전문가들 중 일부는 1990년 1월 8일 방침이 김정일이 기획하고 김일성이 직접 지시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아편재배 과정을 살펴보면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아편재배를 결정하고 지시했음을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해 7월 김일성은 양강도 삼지연군 포태노동자구에 있는 별장으로 피서를 가던 중 양강도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에 들렸습니다.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은 삼지연군 포태노동자구로 이어지는 김일성 전용의 1호 도로와 인접해 있었습니다. 의화리 9작업반은 해방을 몇 달 앞둔 1943년 3월에 일제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당한 갑산공작위원회 간부 리제순의 고향입니다. 1960년대 종파로 몰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갑산파 사건의 주요 인물 리효순은 리제순의 친형이었습니다.

북한은 갑산공작위원회 장백현지구 부위원장으로 김일성의 빨치산을 물심양면으로도운 공을 인정해 1964년 고향인 양강도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에 생가를 다시 짓고 마당 앞에는 구리로 제작된 리제순의 반신상도 실물 크기로 세웠습니다. 보천군 운남리는 리제순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해방을 맞아 풀려난 박달의 고향입니다. 이곳에도 박달의 생가와 반신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김일성은 해마다 피서철이면 이곳을 지나 삼지연군에 있는 별장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갑산파가 떠올라서 그런지 김일성은 리제순과 박달의 생가엔 한 번도 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1990년 3월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집필을 위해 몰래 삼지연군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중 갑자기 리제순의 생가에 들렸습니다. 리제순의 반신상을 바라보던 김일성은 구리로 된 겉면에 녹이 쓸지 않도록 금박을 입힐 것을 지시했습니다. 생가 앞으로 펼쳐진 협동농장 포전(밭)에선 한창 눈이 녹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고 동행했던 간부들은 당시를 더듬었습니다.

눈이 녹는 농장 포전(鋪田)을 한참 바라보며 무언가 깊은 상념에 골몰하던 김일성은 문득 동행하던 ‘당역사연구소’ 소장 강석승에게 여기에 한번 아편을 심어보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아편이라는 소리에 주변 간부들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리제순의 동상에 녹이 쓴 문제로 짜증을 내던 김일성을 달랠 길이 없었던 ‘당역사연구소’ 소장 강석승은 아편이라는 말이 나오자 양강도 당위원회의 간부들에게 좋다는 의사를 표시하라고 말없이 눈빛으로 암시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일성은 아편은 많은 외화를 벌 수 있으면서 타락한 자본주의를 더 빨리 멸망시킬 수 있는 소리 없는 무기라고 하면서 아편재배의 정당성을 역설했습니다. 아편을 심을 데 대한 김일성의 지시는 즉각 아미산총국에 하달됐습니다. 1990년 4월 아미산 총국은 김일성이 지정해 준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에 시범적으로 아편을 심었습니다. 그해 7월 김일성은 피서철을 보내기 위해 삼지연으로 향하던 중 다시 의화리 9작업반에 들려 하얀 꽃이 핀 아편 밭을 둘러보았습니다.

아편 진을 채취할 수 있는 주먹 같은 씨앗 통을 직접 만져보며 김일성은 양강도 보천군을 대담하게 아편농장으로 전환하라고 부추겼습니다. 또 아편이라는 이름이 듣기에 거북하다며 대신 아편을 백도라지로 부르라고 이름까지 붙여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은 아편을 백도라지로, 아편농장을 백도라지농장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1990년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에서 시범적으로 재배한 아편 밭에서 북한은 순도 높은 아편 13kg을 채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힘을 입어 다음해 아미산 총국은 보천군 의화리와 청림리를 산하 아편농장으로 전환했습니다. 아편농장은 국영종합농장에 속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농업근로자로 되어 매달 북한 당국으로부터 월급과 배급을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그렇게 재배한 아편이 ‘고난의 행군’시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북한이라는 가난한 나라를 마약에 찌든 왕국으로 만들어 버릴 줄 당시까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편을 팔아 생활이 훨씬 펴이리라(펼 것이라) 꿈꾸었습니다.

리제순의 동상은 지금도 보천군 의화리 9작업반에 있습니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친형 리효순의 운명을 알게 된다면 리제순이 땅속에서 몸부림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엔 계속해서 보천군 청림리 아편농장에 대해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을 맡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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