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림리 백도라지농장 (2)

김주원∙ 탈북자
201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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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평안남도 안주시에 있는 송학협동농장을 시찰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평안남도 안주시에 있는 송학협동농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 저는 아미산총국 산하 양강도 보천군 청림협동농장이 북한에서 처음으로 백도라지 전문농장으로 지정되던 과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어제 시간에 이어 청림리 백도라지 농장에서 아편재배로 겪었던 후유증들에 대해 이야기 해드리려 합니다. 백도라지라는 이름은 1990년 7월 김일성이 양강도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에 심은 아편 밭을 돌아보면서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양강도 보천군 의화리에서 백도라지라고 부르는 아편재배에 크게 성공하자 북한은 더 많은 아편을 심기 위해 주변 협동농장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민들의 발길이 덜 미치고 과거 아편을 심어본 경험이 있는 보천군 청림리를 지정했습니다. 청림리를 기존의 농사만 짓던 협동농장에서 아편만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국영 백도라지 농장으로 승격시켰습니다. 당시까지 북한에서 종합농장을 국영농장이라고 불렀는데 협동농장의 한 개의 작업반은 국영농장의 분장에 해당됐습니다.

국영농장에서 분장은 협동농장의 작업반처럼 취급되지만 토지면적과 인원은 작업반의 몇 배로 컸습니다. 국영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협동농민이 아닌 농업노동자로 분류돼 매달 북한 당국으로부터 월급과 배급을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보천군 청림리는 아미산 총국 산하여서 그런지 국영농장으로 전환됐지만 하부단위는 분장이 아닌 일반 협동농장들과 마찬가지로 작업반제를 유지했습니다. 청림백도라지농장에서 농사만 전문으로 하는 “농산반”은 2작업반부터 5작업반까지였습니다.

그 외 1작업반은 남새(채소) 작업반, 6작업반은 축산작업반이었고 7작업반은 채종작업반, 8작업반은 수리반, 9작업반은 건설반으로 작업반만 모두 9개였습니다. 아편은 농산반인 2작업반부터 5작업반까지 다섯 개의 작업반에서 심었습니다. 청림리 아편농사에서 톡톡히 재미를 본 북한은 1992년부터 보천군의 18개의 협동농장들 가운데서 신흥리와 의화리, 내곡리, 가림리, 화전리 등 외지인 출입이 잦은 7개의 협동농장을 제외한 11개의 협동농장들을 아편농장으로 전환했습니다.

하지만 92년도에 전환된 보천군의 아편농장들은 노동당 39호실이 관할하는 협동농장이어서 아미산총국에 소속된 청림리처럼 국영농장은 아니었습니다. 협동농장은 식량을 자급자족해야하기 때문에 보통 한두 개 작업반은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1993년 아편을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양강도 보천군 청림리 국영 백도라지농장 농업노동자들은 중앙으로부터 잡곡이 없는 순수 입쌀로만 배급을 받았는데 일반 공업부문 노동자들의 최소 월급이 70원였던데 비해 이들은 최소 90원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아편을 심던 보천군의 다른 협동농장들은 현물분배로 받은 감자와 강냉이, 보리로 끼니를 에워야 했고 그 외 별다른 공급은 없었습니다. 반면 같은 아편을 심던 청림백도라지농장은 매달 식용유 1kg과 빨래비누 3장씩 공급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보천군의 공장기업소들과 농업전문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농촌지원대가 청림리에 투입돼 아편 밭 김매기로부터 아편진 채집까지 맡았습니다. 농업노동자들이 할 일은 아편 진에서 수분을 빼내어 순수 아편으로 만드는 작업뿐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농업귀족이 된 청림리 농업노동자들을 보며 보천군의 다른 협동농장들도 아편재배에 총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편농사만 잘 지으면 다음해부터 자신들도 청림리 백도라지농장처럼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뙈기밭을 버린 청림리 농업노동자들은 집에서 개와 돼지, 닭과 같은 가축만 키웠는데 돼지는 고기를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개나 닭은 알과 육류생산으로 삶의 질을 더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그마저도 팽개치고 있었습니다.

아편 진을 채집할 때에는 청림리 분주소(파출소)와 보천군 안전부(경찰)에서 내려온 무장대원들이 아편 진을 훔치지 못하도록 삼엄하게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아편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몰래 아편을 감추는 방법까지 터득했습니다.

아편 진은 2명이 한조가 되어 보통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채집을 했습니다. 앞서 나가는 사람이 작은 칼날로 아편 열매에 상처를 내면 뒤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오던 다른 사람이 열매에서 흘러나온 진을 작은 컵에 모았습니다. 그렇게 하루에 보통 5~6컵씩 모았는데 그 중에 한 컵을 새지 않게 비닐주머니에 묶어 넣고 볼일을 보러 가는 것처럼 위장해 경비병들을 속여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한 컵의 진에서 수분을 빼면 약 0.5그램 정도의 아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편 0.5그램이면 한번에 10명이 투약할 수 있는 량입니다. 이들이 빼낸 아편은 초기 장마당에서 그램당 120원이었는데 나중엔 그램당 70원까지 값이 내렸습니다. 70원이라도 당시 일반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과 맞먹어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특히 아편을 직접 재배하는 청림리 근로자들 속에서 아편중독자가 연이어 발생했는데 청림리 당위원회 김성원 초급당비서가 법적 처벌을 면할 수 있게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청림리 초급당비서 김성원은 노련하고 인간미가 있는 당 일꾼이었습니다.

근면한 사람들은 가정에서 축산이라도 했지만 게으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아편을 훔쳐 돈을 만들 궁리만 했습니다. 당시 아편시세가 높았던 원인은 동유럽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북한 당국이 의약품 원료를 제대로 수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93년 여름 보천군 인민병원에서는 당장 맹장수술을 앞둔 15살 청소년에게 놓아 줄 마취약이 없어 그의 부모들이 아끼며 보관하던 50%짜리 러시아산 보드카를 먹이고 아편까지 투약한 뒤 수술을 하는 불법적인 의료행위까지 벌어졌습니다.

병원들에는 치과에서 쓸 진통제나 수술실에서 쓸 마취제도 없었습니다. 그 흔하던 감기약도 없어 비싼 돈을 들여 장마당에서 중국산 ‘정통편’을 사먹어야 했습니다. 약국들에선 아편줄기를 달여 만든 농축액 ‘아편엑스’를 설사약으로 팔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보천군 청림리 뿐이 아닌 양강도의 모든 주민들 속에서 아편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일반 양강도의 다른 협동농장들에서도 아편을 많이 심었던 관계로 그램 당 가격은 오히려 내리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1995년 7월 양강도 보천군 안전부(경찰) 계호과 지도원 신경일 중위가 청림리 백도라지 농장에서 생산한 아편 13kg을 중국 친척에게 넘기고 인민폐 30만 위안을 받아 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고난의 행군’시기 영농물자를 마련을 위해 양강도 보위부가 직접 관여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편을 받은 중국 친척이 다른 사람들과 거래하려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돼 사연을 전부 실토해버렸습니다. 중국공안은 신경일 중위를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자신들의 범죄행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넘길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북한은 중국 공안과 합의하고 1996년 3월 양강도 혜산시 혜신동 압록강 제방위에서 수많은 중국인들과 중국공안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신경일 중위를 공개처형했습니다. 신경일 중위는 당시 37세로 어린 아들과 딸을 둔 아버지였습니다. 북한은 공개적으로 신경일 중위를 처형한 뒤 몰래 그의 가족들을 불러 ‘전사증’을 수여했고 당시 보천군 당위원회 간부부 지도원이었던 신경일 중위의 누이 신경숙의 남편은 간부부 부부장으로 승진시켜주는 너절한 놀음까지 벌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양강도 보천군 청림리 백도라지 농장에서 시작된 비극은 아직 서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비극은 다음 시간에 계속 전해드릴 것을 약속하며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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