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림리 백도라지농장(3)

김주원∙ 탈북자
2017-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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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도토리를 따오는 북한의 여자 중학생들. 여름방학 중에 18kg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배낭에 땔감용 나무도 보인다.
산에서 도토리를 따오는 북한의 여자 중학생들. 여름방학 중에 18kg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배낭에 땔감용 나무도 보인다.
사진 제공 - 아시아프레스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 저는 아미산총국 산하 양강도 보천군 청림협동농장이 아편을 재배하면서 겪었던 후유증들에 대해 이야기 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청림리 백도라지농장의 마감 편으로 ‘고난의 행군’ 시기 이들이 겪어야 슬픈 사연들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인민들 누구나 겪어야 했던 굶주림의 역사, 김정일에 의해 강요된 북한 인민들의 죽음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말하라면 지역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단언하는데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이 사망한 해인 1994년, 이해 10월 양강도 보천군 청림리 백도라지농장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들이 남다른 ‘고난의 행군’ 역사를 기록하게 된 것은 김일성이 백도라지 농사라고 이름을 지어준 아편재배 때문이었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7월 8일에 비가 내렸습니다. 이 비는 8월까지 계속되어 북한의 많은 농경지들이 물에 잠겼습니다.

‘김일성의 저주’로 불린 1994년 8월의 대홍수는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더욱이 8월은 농작물이 숙성하는 시기인데 어느 하루도 그치지 않는 비로 하여 그나마 물에 잠기지 않은 농작물도 여물지 못하고 쭉정이만 남았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저주’로 불린 대홍수는 김일성의 암살설로 비화됐습니다. 김일성이 후계자이고 아들인 김정일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북한에 재앙을 불러왔다는 설이었는데 이러한 설은 주민들 속에 큰 공포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주민들은 비록 농사는 망쳤지만 전쟁예비물자로 저축한 식량이 많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부터 농사가 안 돼 전쟁예비물자를 다 털어 먹었다는 사실을 당시 북한의 인민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농사는 망쳤지만 아편은 그 어느 때보다 잘 되었습니다. 도시 노동자들의 배급이 끊기고 인민들이 느끼는 식량난이 커가고 있었지만 청림리 주민들은 아편을 심는 자신들만은 나라에서 정상적인 배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편의 진은 8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채집을 했습니다. 아미산 총국은 아편을 생산하는 기간인 8월 달까지 청림리 주민들에게 배급을 주었습니다. 생산된 아편을 다 거두어 갔을 때 이곳 주민들은 곧 ‘우대상품’이 차례지리라 꿈꾸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예년보다 아편이 잘 되었으니 양복지나 대동강 텔레비죤(TV)과 같은 ‘우대상품’의 가짓수도 더 늘어날 것이라는 게 이들의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우대상품’은 커녕 9월에 받아야 식량조차 공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곳 백도라지농장 김상원 초급당비서가 수십 리도 넘는 양강도 농촌경리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양정과를 쉼없이 오가며 청림리 주민들의 배급을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라”는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군 당위원회를 찾아가 “중앙에서 아편을 거두어 갔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거칠게 항의했다가 김상원은 직무정지 처벌까지 받았습니다. 초급당 비서까지 직무 정지되다 보니 주민들의 배급을 위해 뛸 사람이 없었습니다. 청림리 주민들은 국가배급에 매달려 뙈기밭 농사를 포기했던 자신들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굶주린 주민들은 마을에 남아 있는 가축들을 마구 도둑질하고 축산작업반을 습격해 농장에서 키우던 양과 소까지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1994년 10월 9일 축산을 전문으로 하는 제6작업반에서 태어난 지 3개월밖에 안된 어린이와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가 함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아내와 어린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목을 매 숨졌습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던 10월 굶주림으로 죽음의 문턱에 선 청림리 주민들은 아편농사를 지어 ‘우대상품’으로 받았던 텔레비죤(TV)과 고급양복지를 헐값에 팔아먹었습니다. 지어 돈이 된다면 늄(알루미늄)으로 된 밥 가마까지 팔아먹었습니다.

김상원 초급당비서가 처벌을 받은 상태에서 양강도 무역국과 교섭해 이깔나무 30입방을 주고받아 왔다는 것이 포장지에 소와 양의 머리 그림이 있는 사료용 강냉이 1톤 680kg이었습니다. 통나무 1입방 당 사료용 강냉이 56kg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식량은 통나무를 베어내는데 동원된 농업노동자들과 젖먹이 어린이가 있는 가정들에 조금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청림리 6백 세대의 가정들에 800그램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800그램의 식량은 한 가정이 한 끼 먹을 량도 안됐습니다.

1994년 10월말에 청림리에서 노약자들과 늙은이들을 비롯해 가정세대 7개가 멸족했습니다. 청림리의 식량위기는 보천군에 큰 공포를 불러왔습니다. 군 당위원회에서 현장을 방문했지만 군수예비물자까지 다 털어먹어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해 눈 내리는 12월, 김상원 초급당 비서는 늙고 병든 몸을 끌고 마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작업반장들을 불러냈습니다. 작업반장들과 함께 집집의 문을 일일이 두드려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인기척이 없는 집은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농장에서 젊은 청년들을 불러 모아 굶주린 주민들에게 뜨거운 물을 끓여 나누어 주는 자원봉사도 조직했습니다. 또 농장 진료소에서 비상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아편을 양강도 무역국에 주고 강냉이 가루 2백여kg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가져온 강냉이 가루를 1kg을 큰 밥솥에 넣고 끓여 마을의 모든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1994년 12월 청림리에서 대량아사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가정은 누가 살고 누가 죽는다는 순서가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가정은 온 집안 식구가 통째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고 몰래 보관하던 아편까지 다 팔아 보았지만 식량난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식량이 없는 가정에 오늘 쌀 1kg을 가져다주면 그들의 죽음을 하루 정도 더 늦추어 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995년 1월,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청림리를 떠나는 14살 소녀와 10살 되는 그의 남동생에게 김상원 초급당비서는 닦은 강냉이 한줌과 손톱눈 크기의 아편을 쥐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지만 누구도 초급당비서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편이 고향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하루 식량이 될 수 있음을 마을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1월의 강추위 속에 “여러분 물을 끓여 마십시다”라고 소리치며 눈보라를 헤치던 김상원 초급당비서의 목소리는 큰 동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양강도 당위원회의 지시로 도농촌경리위원회 수출원천동원사업소에 통나무를 팔아 청림리 주민들을 살릴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눈이 녹는 3월, 몇 백 키로그램의 강냉이가 지원됐지만 이미 마을주민들의 4분의 1 이상이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그해 4월 아미산 총국은 농사철에 접어든 청림리에 배급을 내주었습니다. 청림리에 대량 아사사태가 발생했을 땐 아는 척도 안하던 아미산 총국이 아편농사를 시작할 시기가 되니 선심을 쓰는 양 뻔뻔스럽게 통 강냉이를 들고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인민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갈 때 김정일은 수천만 달러를 들여 김일성의 시신을 보관할 ‘금수산기념궁전’을 지었고 ‘광명성 1호’라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거기에 드는 돈으로 식량을 사왔다면, 북한이 처한 아사위기를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리기라도 했다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을지 모릅니다.

청림리 백도라지농장을 덮친 ‘고난의 행군’, 수천억 달러를 벌어들일 아편을 빼앗아 가고 쌀 한줌도 남기지 않은 김정일의 만행은 오늘날 김정은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역사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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