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은행 총재 변승우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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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동포 여러분, 여러분들이 쓰고 있는 내화에는 '조선중앙은행'이란 명판이 찍혀있다는 사실, 새삼스러운 것 아니겠죠? '조선중앙은행'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의 약자입니다. '조선중앙은행'은 북한 금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조선중앙은행'은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옛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행' 평양지점을 근간으로 설립했습니다. 1946년 1월에는 북한의 각 지방들에서 운영되던 '조선은행' 지점까지 '조선중앙은행'으로 간판을 바꾸었습니다.

이후 '조선중앙은행'은 북한의 내각에 소속돼 화폐를 찍어내고 통화를 조절하며 화폐지급과 결제, 저금(예금), 대출, 보험업무와 함께 공장, 기업소가 보유한 설비와 고정재산의 등록 및 평가, 내각의 재정활동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조선중앙은행' 총재는 북한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고 특히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유지되는 북한에서 수령의 신임이 커야만 했습니다. '조선중앙은행' 총재로 유명했던 변승우도 김일성이 총애하던 인물들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20여년 넘게 북한 금융계를 주물러 왔다는 사실 하나만 놓고도 변승우에 대한 김일성의 신임과 애정이 얼마나 남달랐는지를 짐작하고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랬던 변승우에게도 시련이 닥쳤습니다.

1986년 변승우는 가족들과 함께 사리원으로 추방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당시 변승우의 추방사건은 평양시 시민들은 물론 한다하는 북한의 고위 간부 계를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변승우는 소련 유학파 출신이었습니다.

20대에 소련에서 국가경제관리와 재정을 배운 변승우는 러시아어 실력이 뛰어 나기로 이름났습니다. 그래서인지 30대에 벌써 '조선무역은행' 간부로 출세했고 1968년에는 '조선무역은행' 이사장으로까지 출세하게 됩니다.

조선무역은행은 6.25 전쟁 후 복구건설이 끝나고 산업생산량이 증가하기 시작한 1959년 11월 3일에 설립되었습니다. 주로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대외무역 창구로서 국제금융결제 등 외환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해 왔습니다.

북한에서 무역은행은 서방으로부터의 고립을 탈피하고 재일상공인들과의 상업거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인 북한에서 개인의 무역활동은 있을 수 없었고 모든 무역활동은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조선무역은행'도 독자적인 금융기관이 아닌 '조선중앙은행'의 산하기관으로 존재했습니다. '조선무역은행'의 주 업무는 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외화를 관리 하고, 국가에 필요한 외화수요를 원만하게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무역은행 변승우의 능력과 자질을 두고 "변승우 이사장은 금융, 재정일군으로서 꼼꼼하고 고지식한 살림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1969년에는 무역은행 이사장에서 '조선중앙은행' 이사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계속되는 신임으로 그는 1972년 12월 12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 '조선중앙은행' 이사장 이라는 직함이 총재로 바뀌면서 초대 '조선중앙은행' 총재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잘 나가던 '조선중앙은행' 변승우 총재가 숙청된 사연은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40돌과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1946년 10월 1일에 김일성의 이름으로 설립된 데다 김정일의 모교라는 의미에서 북한 교육의 상징으로 꼽혀왔습니다.

북한에서도 가장 권세가 높은 간부들의 자식들이 다니는 대학으로 지금도 유명 합니다. 북한에서 최고위층에 속하는 변승우의 딸 변혜경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변혜경은 "인간의 유전 효과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데다 인물도 흠잡을 데 없고 마음씨도 단정한 여성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런 변혜경에게 졸업을 앞둔 1986년, 대학창립 40돌을 맞으며 시련이 들이닥쳤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당위원회에서 창립 절을 맞으며 대학교수들에게 천연색텔레비전 (컬러TV)과 냉장고를 선물로 주려고 계획하고 몇 년 전부터 대학생들에게 외화벌이 계획을 주었습니다. 대학에서 상업 활동까지 해가며 외화를 모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계획했던 외화 중 10만 달러는 끝내 채우지 못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당위원회는 모자라는 외화를 빌리기 위해 조선중앙 은행 총재인 변승우를 찾아갔으나 당시 그가 병원에 입원해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변승우의 서기를 통해 의사를 여쭈어보았으나 그의 대답은 김정일의 비준이 없으면 외화에 손댈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당위원회에서는 조선중앙은행 당 비서에게 접근하여 변승우 총재를 설득하기로 하였습니다.

조선중앙은행 당 비서의 자녀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지금의 기회가 자식들의 졸업 후 배치문제에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며 김일성종합대학 당 위원회가 비열하게 설득했습니다. 변혜경을 통해서도 변승우 총재를 최대한 회유했습니다. "총재님도 딸자식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배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회유를 차마 뿌리칠 수 없었던 변승우 총재는 확실하게 돌려받는다는 문서까지 만들어 놓고 10만 달러를 대출해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행사에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되돌아 올 줄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금융계를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변승우를 넘어야 했던 조선중앙은행 당 비서가 이 사실을 사건 화하여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했던 것입니다.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국가외화자금을 자기 돈처럼 마음대로 꾸어준 행위는 당을 무시한 안하무인격 행위라며 몹시 분노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로 변승우 총재는 김정일의 신임을 잃고 추방이라는 다시 소생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김일성 종합대학에 빌려준 외화는 즉각 회수되고 교직원들은 선물 없는 창립 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건은 북한의 지식인들과 모교인 김일성종합대학 교직원들이 김정일의 포악성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리원으로 추방된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하던 변승우 총재의 부인은 평양의학대학 앞 도로에서 차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일각에서는 변승우 총재의 부인은 항거의 뜻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결국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노동당 금융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조선중앙은행 총재 변승우의 수십 년간의 노력은 김일성종합대학 창립절 행사를 위한 외화대출 사건으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무상도 아니고 반드시 되돌려 받는다는 조건으로 외화를 빌려주었다는 것이 죄가 되어 변승우 총재는 비참하게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자신의 모교인 김일성종합대학 창립일 을 지원해야 할 사람은 변승우가 아닌 바로 김정일이었습니다.

북한의 많은 간부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제난을 금융인재인 변승우 총재를 쫓아낸 후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북한의 경제난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한 후부터라고 다시 돌이켜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