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투서편지사건

김주원∙ 탈북자
2016.10.11
py_under_construction-620.jpg 북한전문가인 레오니트 페트로프 호주국립대(ANU) 초빙교수는 지난달 29일과 30일 이틀간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70돌 국제학술토론회에 참석했다가 촬영한 평양 시내.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최근 몇 달 사이 해외 대사관에 파견되었던 북한의 간부들이 줄을 이어 한국으로 망명하고 있습니다.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들에서 김정은을 비난하는 낙서가 연이어 발견되고 있다는 소식도 듣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김정은 체제에 균열이 가는 잡음이 유난히 크게 들려오고 있지만 사실 김일성 시대에도 파쇼독재와 부정부패를 비난하는 낙서사건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주민들은 국가보위부의 필적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김일성종합대학에서도 1988년 삐라와 같은 투서편지 사건이 발생해 교내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1987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투서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엔 ‘3대혁명소조’로 지방에 파견돼 있었습니다.

저도 3대혁명 소조원으로 생활을 하던 중 1989년 1월에 휴가를 받고 평양에 들렸다가 그 충격적인 내막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있었던 투서사건을 저에게 처음 들려주신 분은 북한의 영화문학 작가인 민순실 선생님이었습니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광복거리에 살고 있던 민순실 선생은 1986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창작해 김일성과 김정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예술영화 ‘사랑의 노래’의 대본을 직접 완성한 작가로 북한의 영화계에서 명망이 높았습니다.

예술영화 ‘사랑의 노래’는 평양산원을 중심으로 북한의 체제를 선전하는 영화였습니다. 민순실 선생님과 저의 가정은 오랜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성출신인 민순실 선생은 고아로 해방 후 저의 외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민순실 선생이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에 입학하게 된 과정도 저의 외할아버지 노력이 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민순실 선생과 나는 이모와 조카 같은 사이었고 대학생활은 물론 소조생활을 하던 때에도 자주 만나 속을 털어놓았습니다.

소조생활 과정에 휴가를 받았던 1989년 1월에도 저는 지방에 있는 가족들보다 먼저 평양에 계시는 민순실 선생의 집부터 찾았습니다. 저를 반갑게 맞은 민 선생은 집안에서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 듯 평소보다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이끌고 서재로 향했습니다. 네 벽이 책으로 꽉 찬 서재가 요새처럼 느껴졌는지 그제야 큰 숨을 몰아쉬고 그동안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일어난 투서편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투서편지 사건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1988 여름 평양시의 각 구역 체신소(우체국)들에 익명의 편지들이 다발적으로 신고 되었습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편지 봉투들엔 받는 사람의 이름으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라고 적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평양시 각 체신소 우체통에 투서된 편지의 내용은 북한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난 하는 꼭 같은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선 투서에서 김일성의 독재를 강하게 비난하며 낡은 사회주의제도의 연장으로 국가발전을 이끌 수 없다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또 마르크스 ‘자본론’의 모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창조성을 억제하고 경제발전을 침해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가 파악하고 있는 투서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북한사회 성분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투서자는 21세기가 눈앞에 닥쳐왔는데 아직도 봉건사회에서 권력을 유지하던 신분제도가 남아 있는 북한의 체제는 무계급사회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이념과 완전히 상반되는 가혹한 노예사회이고 극악한 착취사회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출신성분이나 가정토대가 없는 진정한 무계급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 국가발전을 위하여 일할 수 있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고 경제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다며 백두산줄기요, 낙동강줄기요 하는 사회계층을 부정했습니다.

북한의 권력층들이 만들어 낸 사회계층 제도에 의해 공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 인성이 돼먹지 않은 자들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간부가 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할 자유마저 빼앗긴 인민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국가보위부가 투서와 관련해 김일성종합대학을 의심한 것은 그 주위의 체신소들 에서 편지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일반주민들에겐 공개되지 않은 비밀들까지 폭로한 것도 김일성종합대학을 의심한 원인으로 됐습니다.

특히 투서편지가 북한에서 이미 사라진지 오랜 등사기로 인쇄됐다는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타자기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엔 주요 국가기관들에서 타자기가 일반화되어 등사기는 더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투서는 파라핀과 바쎌린, 송진을 섞어 만든 등사잉크를 이용해 인쇄했는데 이러한 등사방법은 글을 쓴 사람의 필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결함이 있었습니다. 국가보위부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상대로 투서에 나타난 필적을 대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에서는 김정일의 지시로 ‘수재론’을 강조하면서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에게 ‘우수학생증’을 발급해 주었는데 ‘우수학생증’이 있는 학생들은 인민대 학습당이나 종합대학 도서관 서고에 직접 들어가 비공개도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보위부는 우선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생활총화’ 노트를 모두 회수해 필적을 조사한데 이어 대학 도서관에 드나든 우수학생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수학생 9명이 같은 시각 도서관에 자주 모였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이들의 생활총화 노트를 조사한 결과 투서편지의 필적과 유사한 점도 다수 발견 됐습니다. 특히 이들 9명은 김일성종합대학 5학년과 6학년으로 성적이 뛰어난데다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사정도 모두 비슷했습니다.

국가보위부로부터 투서편지를 직접 받아 본 김정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들 전원을 반드시 잡아내어 극형에 처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수사망이 좁혀지자 투서편지를 쓴 우수학생들은 대학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학생들속에 박아놓은 국가보위부의 첩자들이 주목된 학생들을 철저히 감시했고 국가보위부가 대학 주변을 그물처럼 둘러쌌습니다. 독립적으로 대학을 빠져 나가려던 학생들이 국가보위부에 잡히는 모습도 포착됐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교내에 남아있던 한 학생은 1호 교사의 9층에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도주한 3명을 체포하기 위해 국가보위부는 국경을 봉쇄하는 동시에 도주한 학생들과 친구들의 집까지 급습했습니다.

도주한 학생들은 대동강구역 외국대사관 촌에 은신해 있다가 잠복을 서던 국가 보위부 요원들에 의해 보름 만에 체포됐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가보위부에서 즉결 처형됐음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던 고위급 자녀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투서편지사건에 연루된 학생들 중엔 작가를 꿈꾸며 민순실 선생과 매우 가까웠던 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로인해 민순실 선생도 한동안 국가보위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며 불쌍하게 떠나간 학생들을 동정하는 눈물을 보였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투서편지 사건은 사회주의를 원칙적으로 고수하고자 했던 학생들이 북한의 왜곡되고 독재화된 사회주의를 바로잡으려는 의도에서 시도됐습니다. 때문에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는 학생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원칙주의자들의 조언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김정일은 결국 북한을 세계 최빈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시절의 김정일처럼 아직도 공포정치로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김정은이 앞으로 북한의 인민들에게 어떤 가혹한 운명을 강요하고 나올지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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