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건설과 시책

서울-문성휘, 김태산 xallsl@rfa.org
2017-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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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민들이 쌀 배급을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평양 시민들이 쌀 배급을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기자: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김태산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태산: 네, 안녕하십니까?

기자: 우리부모들이 자라온 시절, 과거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별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또 크게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고요. 네, 사회주의 시책이라는 게 기초적인 배급제, 무상치료제, 그리고 무료교육제. 이런 걸 놓고 말하는 건데 58년도, 금방 사회주의 완성단계다, 그때엔 어땠습니까? 북한의 배급제가 과연 언제부터 있었는지 저는 이게 궁금합니다.

김태산: 배급제는 해방돼서 사무원들에게는 그때부터 배급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정된 배급제가 그 후에도 변하지 않고 계속 흘러왔어요. 크게는 노동자 사무원들에게는 700그램, 대학생들에게는 600, 중학교학생들에게는 500, 인민학교학생들에겐 400, 그다음에 유치원생들과 집에서 노는 사람들에게는 300그램,

기자: 아 지금이나 마찬가지네요.

김태산: 그다음에 80년대 이후에 들어서면서 변한 게 갓 태어난 아이들도 옛날엔 300그램을 주었는데 그 후에 100그램으로 제정되면서 혜택을 전혀 못 봤죠. 배급제도는 어쨌든 그때부터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특징적인 것은 그때에도 계급교양만은 철저히 하게 했어요. 그때 민족우월주의 교양을 많이 들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 우리는 미제침략자들과 15개 추종 국가들과 싸워서 이긴 민족이다. 이것도 전쟁이 끝나고부터 아주 깊이 교육을 시켰고 미국과 남조선 사람들은 원수다 하는 것을 우리 어릴 때부터 계속 세뇌시켜 주었어요. 그 교육을 우리 교장선생이 직접 들어와서 해 주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건 머릿속에 쟁쟁하게 남아있지요, 뿌리가 깊은 교육이었다는 걸 말할 수 있는 거죠.

기자: 네, 그러니까 사회주의를 선포하면서 계급을 나누는 사회적 토대라고 하죠? 이런 게 벌써 진행됐다…

김태산: 우리 어릴 때부터 성분관계 가지고, 우리 형제들을 시집 장가를 보내야 하겠는데 “야 누구네 집 딸이 좋대”하면 “토대가 좋은지 알아봐야지 이거 어떻게 하나?” 그러면 아버지가 우리 리(里)의 안전원하고 친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토대가 좋았으니까, 빨치산 토대는 아니고 뭐 나쁜 짓을 안 한 일반 백성의 집이었으니까 안전원한테 술을 들고 찾아가서는 누구네 집 토대가 좋은가 알아봐 가지고 나쁘다하면 우리 형 대상 여를 약혼녀로 안 삼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이름이) 용식이었는데 “용식이, 너 아들 장가보내야 되겠는데 누구 딸 좋은데 한번 선 보자” 그러면 “그래? 내가 알아보지” 그리곤 우리 아버지가 “누구네 집 딸이 좋다는데 그 집 토대가 어떻소?”하고 물어보고 오는 거예요. 그리고 와서 우리 엄마하고 “야, 그 집 토대가 나쁘대. 그 집 누가 치안대 했대” 아니면 “옛날 지주였대” 나 어릴 때 그게 무슨 소린가 했어요. 그런데 점점 크면서 뇌에 와 닿았죠. 그때부터 인민들 속에서 성분 나쁜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을 하면 안 된다, 가까이 해도 안 된다. 친해도 안 된다 하는 걸 우리는 어른들한테서 배우면서 자란 겁니다.

기자: 아, 1950년대부터 그랬다… 좀 딱딱하긴 한데 한 가지 더 질문을 할게요. 북한이 가정마다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제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는 김일성이 중국옷을 입었어요. 중국옷을 입었는데, 치마처럼 쭉 연결된 옷인데 노동신문을 들고 의자에 앉아있는 그런 초상화를 걸고 있었거든요.

김태산: 그러니까 1960년에 제가 8살이 되어 인민(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엔 초상화가 없었습니다. 그때 학교에 가니깐 학교에 김일성의 초상화가 있었어요. 네, 학교에는 있었어요.

기자: 학교는 매 교실들에 다 김일성의 초상화가 있었어요?

김태산: 네, 학교에는 있었는데 김정일이 1960년대 초 중앙당에 들어갔을 때부터 가정들에도 걸었어요, 제 생각에는… 그런데 그게 아마 지역별로는 조금씩 달랐던 것 같아요. 평양시에는 그때부터 가정에 초상화가 있었다는 소릴 들었어요. 그러나 지방엔 그때까지 (김일성의) 초상화가 없었습니다. 남쪽은 1950년, 60년대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는데 북쪽은 뭐, 지금 와서 생각을 해 보면 사람들 살기가 어려웠던 세상 같았습니다. 상점에도 그땐 사탕은 있었어요. 사탕은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한 달에 북한 돈으로 32원 타가지고 사탕 사 먹을 여력이 없었어요. 사탕 1kg에 그때 1원 50전을 했는데 그걸 한 달에 한 알도 못 먹어 봤어요.

기자: 아, 저도 기억이 나는 게 70년대에는요. 저의 아버지 월급이 113원, 이 정도였어요.

김태산: 노임을 50원 이상 올려주는 혜택이 1972년도에 나와서 저도 69년도에 공장에서 32원을 탔는데 50원을 더 받으니까 얼마나 기쁘던지, 그걸 가지고 북한이 얼마나 선전을 했어요. 그때 간부들은 백 원 넘게 탔죠.

기자: 네, 그때엔 상점에서 술이랑 팔았어요.

김태산: 그렇죠. 72년도, 그때만 해도 술이 꽝꽝 나오고 계란이 한 알에 17전짜리가 막 쏟아져 나오는데 돈이 없어서 못 사먹었고 명태도 너무 많아서 썩어 나가고 과자, 사탕 막 여름엔 질질 녹고 있는데 그때엔 오히려 돈이 없어서 못 먹었어요. 그런데 어찌 보면 그때를 북한사람들은 잊지 못하고 “그때 벌써 공산주의사회가 왔다가 갔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 상태가 몇 년 동안 지나서 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니까 벌써 경제퇴락이 시작되면서 점점 없어졌어요.

기자: 제가 어렸을 때 보니까 북한에 세금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때에도 집 사용료가 1원 20전, 전기사용료가 1원, 이렇게 말로는 사용료라고 했지만 세금이죠. 그런 게 있었습니다. 그게 (아버지가 받는) 월급 113원에서 작은 돈은 아니었거든요.

김태산: 그렇죠.

기자: 저희 가까이에 떡집이 있었는데 떡집에서 한번 떡을 먹으려면 값이 1원 20전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비싸서 못 사먹는 거예요. 떡이 없어서 못 사먹는 게 아니라. 저도 어쩌다 엄마가 1원 20전을 주면 형제들 다 가서 한 그릇을 사서 나눠 먹는 거예요. 냠냠하긴 했지만 그래도 식당에 갔다, 먹었다, 이런 의미가 상당히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때 술 1원 20전, 1원 30전, 이렇게 했는데 일부러 술값은 그렇게 비싸게 받은 것 같습니다. 북한에 이런 정책이 있지 않았습니까? 생필품은 값을 낮추고 기호품은 값을 상당히 올린다, 그때 돈으로 ‘풍년’이라든가 ‘비둘기’ 이런 재봉기(미싱)는 북한 돈으로 1천원이었어요. 사무원들의 월급이 113원이었는데 그때 ‘모란봉’ 손시계라는 게 ‘세이코’ 부속을 들여다 만든 북한에서 제일 좋은 시계였지 않습니까? 그 ‘모란봉’ 손시계가 답사 가서 사온 게 4백 원이었습니다.

김태산: 네, 어쨌든 대중상품이 아닌 것은 값을 국가적으로 올리고 대중생활품들은 값을 내리는 원칙에서 김일성이 하라고 그래서 그 원칙을 지켜왔어요. 북한에는 가격제정 위원회라는 게 있지 않아요. 모든 상품들을 생산해 가지고는 가격제정위원회에 원가를 타산해서 “우리 이만큼 하려고 합니다”라면 가격제정위원회에서 정책적으로 분석해 보고 “이건 더 떨구라, 더 올리라” 이렇게 해서 국가적으로 레벨을 맞추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속은 건 노동자들한테 주어야 할 걸 주지 않으면서 그게 마치도 세금 없는 자기네 사회주의 제도가 좋다는 것처럼 선전해 왔던 겁니다. 남쪽에 와보니 세금은 많은 사회지만 노동자, 사무(공무)원들이 일하고 자기 돈을 다 받아서 살아간다는 자체가 좋습니다. 그러니깐 공짜를 좋아하던 나라는 나는 좋지 않다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아 본 사람으로서 정답을 내리는 겁니다.

기자: 네, 사회주의를 선포하기 전 북한은 현물세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은 현물세 제도를 인민을 위한 제도로 선전하고 있는데 저는 부모님들로부터 “그렇지 않았다. 현물세를 거두어 가면 정말 어려웠다. 이런 산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김태산: 네, 없어서 몰래 땅에다 파묻고 그랬어요. 몰래 땅에다 파묻고 그러면 현물세를 받으려 나온 국가기관 일꾼들이 쇠막대기 이런 걸 가지고 땅을 뒤져가지고 식량이 나오면 그 사람들을 잡아가고 나쁘다고 (총으로) 쏘고 그랬어요. 그거 어릴 때 기억이 생생히 나는데 그때 현물세 제도는 정말 농민들을 울리는 제도였어요.

네, 지금까지 현물세 제도와 과거 북한이 사회주의 시책을 시행하고 사회주의를 선포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앞으로 북한에서 언제부터 무엇이 잘 못됐는지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이 오갔으면 좋겠고요. 오늘 시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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