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의 추억

서울-문성휘, 김태산 xallsl@rfa.org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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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작우체국 집배원들이 거리에 설치된 우체통의 먼지를 닦아내고 있다.
서울동작우체국 집배원들이 거리에 설치된 우체통의 먼지를 닦아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안녕하십니까?

김태산: 네, 오랜만입니다.

기자: 네, 김 선생님 요새 건강도 좋지 않다고 하던데…

김태산: 아이고, 감사합니다.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우리 옛날에 말입니다. 우체국, 그리고 마을마다 ‘우편통신원’이 있지 않았습니까?

김태산: 아, 참 그 말씀 들으니깐 감회가 새롭네요. 남쪽에 온지 이젠 한 15년이 되다보니 그 말이 거의나 사라졌었는데. 물론 남쪽에도 우편통신원이 있지만 북한의 우편통신원 하면 저 어릴 때의 생각도 나고 참 감회가 새롭네요.

기자: 아, 그리고 북한에선 한국의 우체국을 ‘체신소’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부터 체신소였던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초기부터 체신소였는지 아니면 한국처럼 우체국, 우편국 이렇게 불리다 체신소로 이름이 바뀐 것인지?

김태산: 아니, 제가 알고 있기는 초기부터 체신소로 알고 있습니다. 북조선 인민정부가 세워진 그때부터 체신성이 있었거든요. 그때로부터 북한은 지금도 체신성은 있습니다. 체신성이 있고 거기서 모든 전보, 우편, 그 다음에 북한의 일간지인 ‘노동신문’, 이런 걸 배포하는 것을 체신성이 책임지고 그 밑에다 체송국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는데 행정적으로는 체신성에서 관리하고 정치적으로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가 관리하면서 철도를 통해 각 도와 군에까지 배포하면 그 밑에 이제 각 군에 체신소를 두고 이제 체신소에서 25리 정도에 체신 분소를 하나씩 두고 여기에서 당의 기관지인 ‘노동신문’을 배포하고 전보, 편지, 소포 이런 것까지 배달하는 체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통신원이, 그때는 ‘통신원’이라고 팔에다 완장을 착용했어요. ‘통신원’ 완장을 띠고 이자 말처럼 25리, 50리에 하나씩 통신 분소를 두었기 때문에 한 통신원이 걸어가서 편지를 전달하고 이렇게 됐는데 우편통신원들이 올 때마다 집집마다 달려 나와서 “우리 집엔 편지 온 거 없나?” 하면서 매 집들에서 마주 달려 나가고 또 통신원이 오게 되면 가정들에선 반가워하며 밥도 있으면 먹여서 보내고 참 친하게 지냈어요.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한때 통신원들이 정말 몸값이 높았던 시절이 있었죠. 저의 지역에서는 여성이 우편통신원을 했는데 이게 80년대입니다. 그때는 (북한이) 모든 게 정상이었을 때인데 김일성의 ‘신년사’가 새해 첫날에 오지 않습니까? 그걸 제때에 전달하겠다고 배낭에다 지고 품에다 안았다고 했는데 그건 보지 못했으니깐 알 수 없는 거고 그렇게 30리, 40리 길을 전해주고 돌아오다 나니까 손발이 다 얼었대요. 그래서 굉장히 표창도 주고 신문에도 나고 그랬어요.

김태산: 맞습니다. 그때 그런 소행들이 많았죠. 이자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한명의 통신원이 15리, 20리를 전달해주고 돌아오다 나니 하루에 왕복으로 30리, 40리씩 꼬박 걸어서 다녔어요. 농촌이어서 편지가 많지 않은 경우엔 이틀에 한번 이렇게 통신원들이 왔다 가곤 했는데 여성들이 많았어요. 저희 시대에도 여성들이 편지를 가지고 오게 되면 그때 우리 어머니가 우편통신원을 딸 같이 대해주면서 오이냉국도 만들어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기 남쪽에 와보니까 편지도 통신원들이 다 오토바이를 타고 전달해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에서는 우편통신원들이 자전거조차 없어서 걸러 다니는데 남북한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는 것보다 제가 어렸을 때 우편통신원은 팔에 ‘우편통신원’이라고 완장을 둘렀으니깐 “야! 통신원이 온다”하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옛날의 말대로 배달원이라고 그랬어요. “오늘 배달원이 왔나?”하면 내가 “아빠 통신원이라고 해야지 배달부가 뭐야?” 하니까 “오, 옛날 일제 강점기부터 배달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배달’이라는 게 도대체 뭐지? 하고 생각하던 때도 있습니다.

기자: 네, 저도 어릴 때 우편통신원을 ‘배달원, 배달원’ 이렇게 불러서 “왜 배달원이라고 하나?” 이렇게 물어보았던 적이 진짜 기억납니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북한은 아직도 우편통신원들이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편지는 북한에서 이젠 사라졌습니다.

김태산: 사라졌으면 어떻게 서로가 연락을 합니까?

기자: 전화로 다 연결을 하죠. 이젠 전화망이 발달돼서 가정집들에 거의 집전화가 들어갔습니다.

김태산: 아니 그럼 그건 군까지는 괜찮겠지만 농촌, 리들에는 아직 전화가 들어가지 않았겠는데?…

기자: 아, 그러니까 군이면 군에 자기가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는 거죠. 이걸 좀 전달 해 달라. 가족 중에서 누가 사망했다, 어떻게 됐다, 그러면 이걸 전달받은 사람이 농촌에 있는 사람에게 전해주러 가는 겁니다. 이렇게 체계가 발달됐는데 통신원이 아직까지 있는 이유는 ‘노동신문’ 있지 않습니까? 이 ‘노동신문’을 배달하고 전보, 가끔씩 전화로도 연락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전보를 하는데 전보라는 건 사망전보밖에 없지 않습니까?

김태산: 급히 부모가 앓는다던지 뭐 이런 것밖에 없죠.

기자: 네, 그 전보가 아직까지 있기 때문에 통신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김태산: 옳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1970년대 말까지는 그래도 통신원들이 양심적으로 편지도 전달해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지방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배급을 안 주고 배곯고 그러니까 통신원들이 배가 고프니까 자기 거리를 뛰지 않고 도중에 편지 같은 거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전보 같은 거 방금 말한 것처럼 누가 사망했다는 전보는 할 수 없이 전달해 주고 일체 편지는 거의나 전달이 안됐습니다. 일반 편지는 도중에 사라져도 그게 어데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깐 등기편지 같은 거나 좀 전달되고 ‘노동신문’ 같은 거나 배달하려고 좀 움직였지 그때부터 거의나 북한에서 통신원들이 자기 직무를 상실했다고 봐야죠. 한마디로 배급제도가 없어지면서 통신원들의 역할이 거의나 실효성이 없어졌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젠 거의나 전화로 소식을 전한다는 거죠?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1980년대 초반에 아마 제 일생에서 제일 큰 범죄의 하나를 저질렀는데 그때 저는 인민학교(초등학교)였습니다. 이게 인민학교 학생들 속에서 굉장히 유행했습니다. 우편통 열쇠가 매우 단순하거든요, 여자들 머리핀으로도 쉽게 열립니다. 대체로 체신소 아니면 어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우체통이 있죠.

김태산: 네, 제가 어렸을 적엔 소비조합, 말하자면 농촌상점 기둥에다 시퍼런 페인트 칠을 한 우체통을 걸어 놓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멀어도 거기까지 와서 편지를 넣어야 통신원들이 와서 가져가게 되어있죠.

기자: 네, 그런데 우리는 그때 왜 그랬는지 통신원들과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눈치를 보면서 편지를 훔치는 게 하나의 유행이었어요. 우체통에서 편지를 훔쳐 와서는 서로 학교에 와 뜯어서 읽어 보고 편지엔 “죽었다. 보고싶다” 이런 내용인데 사연이 크면 내가 더 중요한 걸 얻은 것으로 되죠. 그걸 놓고 키득거리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하죠.

김태산: 아, 그게 큰 범죄인데…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그때 이게 우리 학생들속에서 하나의 유행이어서 눈치를 슬슬 보다가 일부러 우체통 문을 만지작거리는 겁니다. 그러면 통신원들이 와서 확 덮치는 거죠. 이럴 때 “왜 그러냐”하면 “이 놈, 너 지금 이걸 열어서 편지를 훔치자고 그러는 게 아니냐?”하면 “자, 보라요. 나 손에 아무것도 없어요” 하면서 주머니랑 다 뒤집어 보이는 거예요. “난 그저 여기 앉아 쉬려고 했는데, 뭘 찾느라고 그랬는데 왜 날 이렇게 건드리는 거에요?” 이것도 하나의 유행이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좀 놀리기도 하고…

김태산: 장난이 좀 험했네요.

기자: 네, 참 그랬죠.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오늘 좋은 얘기 정말 많이 나눴습니다.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

기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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