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서울-문성휘, 김태산 xallsl@rfa.org
2017-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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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 인근 원정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천안함 46용사와 해군인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다.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 인근 원정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천안함 46용사와 해군인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안녕하십니까?

김태산: 네, 오랜만입니다.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저는 어릴 적부터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면 편지를 쓸 사람이 없으니깐. 북한은 자기 가족, 친척들이 다 한 곳에 몰려 살지 않습니까. 이동의 자유가 없으니깐. 그리고 있다면 멀리 시집을 간 이모들이나 누이들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굳이 편지로 뭘 주고받는다? 차라리 일 년에 한두 번씩 만나는 게 낫지 편지를 아무리 써야 무슨 의미기 있는 것 같지 않고…

김태산: 아, 그러네요. 제가 쭉 역사를 뒤집어 보면 북한에 편지가 가고 소포가 가는데 겉에 주소가 있지 않습니까? 그 주소에는 네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 사회적인 주소. 말하자면 “평양시 어느 구역 어느 동 몇 반”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가 조선인민군 우편함인데 조선인민군 우편함은 인민군대에 가는 거고, 그건 인민무력부에서 관리하거든요.

그 다음에 “조선평양 120호 몇 호직장 누구” 이렇게 하면 평양까지 무조건 올라갑니다. 자강도에 있는 군수공장에 하루 만에 갈 편지도 그 군수공장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비밀로 붙이기 위해 ‘조선 평양’이라는 걸 붙였거든요. 내가 있던 공장이 자강도에 있는 121호 군수공장인데 나한테 붙이는 편지는 자강도에 있는 우리 부모가 보내는 건데도 평양까지 무조건 올라갑니다.

그 다음에 평양 체신성에 들어가서 ‘조선평양’ 우편만 다루는 부서가 있어요. 거기 들어가서 121호 공장은 강계, 24호 공장은 평안남도, 이렇게 분활되고 그 다음 네 번째가 “조선평양 사서함 무엇”이라는 게 있어요. ‘사서함’으로 된 건 교화(교도)소 죄인들에게 가는 편지, 사회안전성(경찰) 산하 특수기관들에 가는 편지, 이렇게 북한의 주소로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일반 사회적인 주소, 그리고 ‘조선인민군’ 하는 건 인민군대 주소, 그 다음에 ‘조선평양’ 하는 건 군수공장 주소, 그 다음 ‘사서함’이라는 건 인민보안성 산하와 보위성, 그리고 교화소에 가는 주소입니다. 또 외국에 나가는 우편은 그냥 일반 주소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체신성 산하에 특별관리 대상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은 다 등록이 돼 있어 가지고 체신성 산하에는 편지 검열을 하는 부서가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는 편지라고 해서 100% 다 보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이 사람은 봐야해”하고 빨간 줄을 친 거죠. 감시대상으로 등록돼 있는 사람들은 해당 부문에서 편지를 다 검열해 보고 보냅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소련도 보면 편지 감시가 있었고, 그러나 북한의 주민들은 누구나 다 편지를 감시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80년대 초반까지는 제 기억에 잘 남는 게 집집마다 우편통이 다 있지 않았습니까? 그 우편통에 ‘노동신문’도 넣어주고 그 때엔 ‘민주조선’, ‘시대’, ‘혁명전선’ 이런 잡지들이 많이 나올 때입니다. 그리고 교육출판사에서 ‘우리동무’라는 잡지도 출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잡지들과 편지를 다 우체통에 넣지 않습니까? 1980년대 초까지는 보통 편지가 가는데 보름이 걸렸는데 벌써 85년이 지나니깐 “편지를 받았니? 내가 올해 1월달에 썼는데”하고 물어보면 “아이고 언니, 그거 6월달에 받았어”라는 거예요. 편지보다 사람이 먼저 온 거에요. 와서 “내가 편지를 썼는데?”하면 “아이고 나는 몰라. 이제 집에 가면 어느 때 받게 되겠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점점 편지를 신뢰하지 않게 된 거죠.

김태산: 네, 옳습니다. 신망을 잃은 거지요.

기자: 그리고 또 좀 경계대상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토대가 나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편지는 몰래 보위원들이 다 뜯어본다. 그런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사생활 문제, 이런 것 때문에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점차 적어졌습니다.

김태산: 사실상 개인의 통신이라는 게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러니까 이게 신뢰의 첫 번째 대상이 되어야 하겠는데 북한이라는 사회에서는 그때부터 (신뢰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조금 전에 선생이 한 말이 “편지를 써 본적도 없고 받아 본 적도 없다”고 했으니 편지를 기다리는 그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어려서부터 부모 품을 떠나서, 우리 형제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나니 편지를 자주 주고받고 제가 군수공장에 어릴 때 갔으니까 배가 너무 고파서 맏형이 안전부(경찰)에 있어서 생활이 좀 괜찮으니까 “형, 나 배고픈데 양표 좀 보내라”고 편지를 하죠.

기자: 아, 양권이라고 있었죠.

김태산: 네, 북한에 양권이라고 있었습니다. 식당에 가서 200그램짜리 양권 하나 떼어 주고 돈을 내면 국수 한 그릇씩 먹을 수 있었죠. 형이 이제 “알았다 보낸다” 하고는 그걸 편지 속에다 보냈어요. 뭐 다르게 보낼 방법이 없지 않았어요? 편지 속에다 넣어 보내면 나는 계속 그 편지가 언제 오겠나 하고 공장에 출근했다가 점심 먹으러 나오면 우리 합숙(기숙사) 식당에다 편지를 쭉 깔아 놓곤 했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달려가서 편지를 서로 보느라고, (기숙사) 호실 동무들은 나한테 편지가 오면 좋아하며 가져다 주고 나도 또 호실 동무들의 편지가 있으면 가져다 주고, 편지를 솔직히 나는 애타게 기다려 본 적도 있고 또 편지를 써 본적도 많으니까 참 그 서신거래에 대해 생각을 하면 눈물겨운 사연도 있죠.

기자: 네, 그땐 정말 그랬겠네요?

김태산: 네, 저는 또 솔직히 체코(체코슬로바키아)에 여성 노동자들을 많이 데리고 나가서 있다 나니까 그들이 북한에 있는 부모들에게 자주 편지를 씁니다. 쓰면 좀 전에 한 말처럼 언제 도착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부모들이 또 체코에 있는 자식들에게 회답을 씁니다. 답장이 오는 걸 보면 정말 1월달에 쓴 편지가 6월달 아니면 1년이 거의 돼서야 오거든요. 그런데 오는 걸 보면 1월 달에 쓴 편지가 3월달, 4월달에 쓴 다른 편지들과 같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체신성에서 모았다가 한꺼번에 국가별로 내보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기다리다 못해 다시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6개월 전 엄마에게 쓴 편지가 오고…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저는 정말 편지를 써도 못 봤고 받아도 못 봤다고 하는데 실은 쓰기는 한 열댓 번 쓴 것 같아요. 왜냐면 해마다 2월 8일이면 그때는 그게 창군절이었지 않습니까? 그 다음 4월 25일(조선혁명군 창립일) 이 날이 되면 계속 “군대아저씨들 힘내세요” 이런 편지를 썼거든요.

김태산: 그건 누구나 다 썼죠. 나도 해마다 쓴 거 아닙니까?

기자: 그렇죠. 학급에서 다 앉혀놓고 종이를 주지 않습니까?

김태산: “인민군 장병들에게, 인민군 아저씨들에게” 이렇게 뭐…

기자: 개별적인 학생들이 다 무슨 인민학교 아무개, 이렇게 써서 누구한테 보내는지도 모르고 그저 선생이 불러준 대로 적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게 어떻게 가는지 받아서 본다고 하더라고요.

김태산: 네, 가는 게 그때는 체신성으로 보내지 않았어요. 그걸 묶어가지고 이제 소년단이면 소년단에서, 민청이면 민청, 여맹이면 여맹에서 2.8절 명절에 떡이랑 쳐가지고 가면서 그 편지들을 모아가지고 인민군 병사들에게 다 하나씩 나누어 주었어요. 인민군대한테 가는 편지는 위문단들이 가면서 한 장씩 다 돌렸죠.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그런데 저희 때는 위문편지라고 했는데 자꾸 인민군 원호사업, 지원 사업을 ‘원호사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은 ‘원호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호편지를 쓴다”, 이게 위문편지죠. 그리고 저는 직접 편지를 쓴 건 없어도 저의 앞집에 저를 엄청 귀여워하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잘 걷지 못했거든요. 이 분의 딸이 황해도 쪽에 시집갔는데 그때에도 ‘여행증’ 한번 뗀다는 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아마 한 열흘에 한두 번씩 편지를 쓰는 것 같습니다. 나보고 “아무개야 이거 갈 때 집에 들려라”하면 난 또 “응 이거 또 편지 썼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럼 가져다가 우체통에 넣어주고 그런 일은 많이 해 보았습니다.

김태산: 남의 편지 보기도 하고 남의 편지 날라주기도 했네요. 네, 북한에서의 서신, 말하자면 국가적으로 개인들에게, 국민들에게 해줘야 할 그 응당한 의무, 또 국민들은 누려야 할 권리를 국가로 보장받지 못하는 참 그런 게 좀 있습니다.

기자: 네, 그러니까 편지가 자연히 사라지게 됐다는 거죠. 뭐 북한에 통신이 좋아지거나, 아니면 다른 무슨 소식을 전할 수단이 많아진 것이 아니라 자꾸 그런 신뢰의 문제가 쌓이면서 감시라는 그런 눈을 피하기 위해 점차 사람들이 편지를 안 쓰게 된 거죠.

김태산: 네, 그렇죠.

기자: 오늘 참 좋은 얘기 많이 나눴고요.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

기자: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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