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유선방송의 역사 (3)

서울-문성휘, 김태산 xallsl@rfa.org
2017-11-24
이메일
댓글
공유
인쇄
  • 인쇄
  • 공유
  • 댓글
  • 이메일
담배와 스낵 등을 판매하고 있는 북한 주민.
담배와 스낵 등을 판매하고 있는 북한 주민.
AP Photo/David Guttenfelder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선생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김태산: 네, 안녕하십니까?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오늘도 어제 시간에 이어 북한의 방송역사, 특히 유선방송의 역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계속 나누려 합니다.

김태산: 네.

기자: 80년대에 포전(논밭)이나 마을 어디든 가면 공설방송이라는 게 다 있었어요. 한국은 지금도 그 방송이 있지 않습니까? 위험신호나 어떤 재난에 대비해서 어느 외진 마을이나 이런데 가면 그런 방송들이 다 설치돼 있지 않습니까?

김태산: 다 설치돼 있죠. 이장이 마이크를 들고 말하는 그걸 가리키는 거죠?

기자: 네, 그런데 북한도 그때 보면 밭 한가운데 전주대 있는데 이렇게 크게 나팔(스키커) 그런 걸 설치해 가지고, 그것도 이렇게 4개씩 묶어 놓았죠.

김태산: 나팔, 묶어서 방향별로 설치했었죠.

기자: 네, 그 방송이 되게 시끄러웠던 게 밤에 11시까지 계속 켜놓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방송이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었어요. 와, 그게 정말 괴로웠어요. 조금이라도 예민하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아픈 날에는 그 방송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김태산: 주민부락엔 다 있었죠. 이 소재지나 거기는 큰 나팔통 매달아서 사면팔방, 동서남북으로 나가게 했죠. 어른이 되어서는 그 방송을 못 들어봤는데 제가 말레이시아에 몇 년 동안 나가있으면서 보니까 그때에 북한에서 듣던 기억이 났는데 말레이시아는 종교방송으로 각 마을마다 교회 같은 것 있어가지고 거기서 이제 나팔을 사방에 설치하고 기도시간이 되면 기도하고 노래하는 걸 그렇게 소란스럽게 불어대는데 “야, 이게 옛날 북한식으로 교육을 하네”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자 기자 선생이 얘기하니 또 옛날 생각이 나네요.

기자: 네, 이슬람 사원에서 하는 거죠. 북한은 그 어디로 가나 그 유선방송이 들릴 수 있게, 밖에만 나오면 어디서든 그 유선방송이 들렸거든요.

김태산: 그렇죠. 그게 이당 위원장이 있고 이당 사상부위원장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전문 그 방송을 관리했어요. 그 사람 밑에는 방송원이라고 좀 예쁜 아가씨들 데려다 놓고 이당 사무실에서 방송 다 조절해서 내보내게 했죠.

기자: 그, 뭐가 있었냐면 “제3방송입니다. 잠시 후 중대 방송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런 게 있어요. 그러면 80년대 저의 집 앞이 다 밭이었어요. 협동농장 밭이었는데 농사를 짓던 사람들도 다 그 밑에 가서 앉아요.

김태산: 집체적으로 들어야 되니깐.

기자: 네, 방송 앞에 다 앉아서 일을 중단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몇 월 몇 일에 내놓은 노작, 8.3 인민소비품 생산을 더 늘일데 대하여” 이렇게 하면서 방송원이 그걸 쭉 읽어주는 거예요. 그때는 신문보다 방송이 훨씬 빨랐으니까 그걸 앉아서 다 들으면서 또 우린 그때 재미 있은 게 방송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또 무슨 결의 모임 같은 걸해요. “이자 방송을 들으니까 어떻게 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납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활총화 비슷한 게 있더라고요. “아, 그래서 저 야외 방송이 필요한가 보다” 주민들을 선전하고 선동하는데 써먹으려고, 그땐 공장들도 그랬는지 우리 농촌에선 다 호미로 김을 매다가도 “3방송입니다. 중대 방송을 내 보내겠습니다” 하면 그 앞에 가서 다 앉아서 청취를 하는데 애들이 가서 구경을 하면 막 쫒아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3방송을 그저 흘려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아주 딱 곱씹어…

김태산: 듣지 않고는 토론을 못하게 만들어 놓는 거겠네요.

기자: 네,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아요.

김태산: 졸았다가는 토론을 못하겠네요.

기자: 네, 이 방송 내용과 결합해 자신은 어떻게 하겠다, 이런 걸 말하자면 그 방송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들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생각을 해보면 수법도 정말 교묘했다, 뭐 악랄했다, 이렇게 말하면 되죠.

김태산: 제가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군수공장에서 일할 때 거기 군수공장 일대는 밀집됐고 노동자들의 구역은 군대와 같은 규율 속에서 움직이니까 그렇게까지는 안했어요. 그런데 제가 평양에 대학을 졸업하고 살림을 하면서 보니까 인민반장들이 드문 히 검열을 나옵니다. 스피커를 달았는가?

기자: 네, 자주 왔죠.

김태산: 네, 방송을 꺼놓으면 안 되는 거예요. 방송이 나오게 틀어 놓았는가? 작게라도 켜 놓아야지 시끄럽다고 꺼놓으면 그때엔 문제가 좀 복잡했어요. 그런데 북한에서 만드는 방송은 좀 깨끗지 못하지 않아요? 그래서 소련에 출장을 갔다 오다가 비닐로 작고 깨끗하게 만든 것 하나 사서 달았죠. 인민반장이 와 보고서 “방송 깨끗하고 좋은 것 달았다”하던 생각도 들어요. 어쨌든 방송을 밤에 잘 때에도 계속 노래 소리가 나오고 시끄러우니까 솔직히 꺼요. 그러면 그걸 껐다고 시비를 걸기 때문에 작게 틀어놓곤 했는데 1960년대부터 90년대, 2천년대까지 내가 한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는, 지금도 그렇겠죠. 방송과 같은 선전선동 수단은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문성휘: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많이 변했는데 80년대까지는 저녁에 잠에 들면서 방송을 꺼요. 그건 허용이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벌써 새벽 5시 전에 방송을 켜요. 그러면 조선중앙방송 새벽 5시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소리신호가 나고 “조선중앙방송입니다” 하고 그때엔 인민보건체조라는 게 있었어요.

그것도 한때엔 인민보건체조를 마을에서 다 모여서 하라고, 집에서 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 동네마다 아버지 어머니들이 나가서, 그 집에서 누군가 한사람씩 나와야 하는 거예요. 의무적으로 한사람씩 나와서 그 인민보건체조를 따라서 하는 거예요. 방송에서 “자, 무릎 굽혔다 펴기입니다. 하나, 둘, 셋, 넷”하면 그걸 다 따라하고 왜 그렇게 만들어놨냐 생각을 해봤더니 그거예요.

매 가정세대마다 한명씩 나와서 인민보건체조를 하고서는 그게 끝나면 인민반장이 이번 달에 무엇을 해야 합니다, 어떤 걸 해야 합니다. 이런 걸 말해 주는 거예요. 중앙에서 유선방송이 아니라 개별적인 가정세대들 ‘좋은 일하기’, ‘꼬마 숲 가꾸기’ 이런 게 굉장히 많지 않았어요? 어린애들도 다 토끼를 기르게 하고 그걸 수탈하고 하던 때인데 그러니까 이런 걸 다 포치(전달)하는 거예요. 그래서 집안에서 누구든 한명씩 나오라, 80년대엔 그게 정말 시끄러웠어요. 그리고 제가 정말 신기하던 게 방송검열을 오면요. 막대기 하나씩 들고 오지 않습니까? 긴 막대기…

김태산: 그렇죠.

기자: 그 막대기를 방송 선에 척 가져다 대면 우리 집에 방송을 켰는지 안켰는지 알아요.

김태산: 네, 그렇죠.

기자: 되게 신기하더라고요. 막대기를 방송 선에 딱 대보고는 “너네 방송을 껐지? 문을 열어라” 하는 거예요. 그땐 꼼짝 못하죠. 들어가 보면 방송이 꺼져 있고 그때면 인민반 누구 네라고 적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몇 일후 아버지가 와서 난리도 아니였어요. “왜 방송을 꺼 놓았냐?”하고, 그 다음부터 제 속이 좀 시원하더라고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북한을 망하게 했다고 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88년, 89년 그때 벌써 방송들을 다 거두어 가고 그때입니다. 그때부터 벌써 허물어지기 시작했어요. 이 집 앞에 있던 공용방송, 유선방송, 이게 꽝꽝 울리던 게 그때부터 전기사정으로 방송을 제대로 못하고 거기다 그 방송이 알루미늄으로 된 거, 꽤나 무거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걸 다 떼어가는 거예요.

김태산: 아, 그 방송 나팔통? 그게 한 10kg 이상은 나가죠?

기자: 네, 그러니까 그걸 다 떼어(도둑질 해) 가니까.

김태산: 가져다가 깨어서 팔든가 수매를 하던가 하는 거네요?

기자: 네, 그러니까 나중에 체신소에서 나와 남아있던 방송들을 다 철수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방송이 점차 방송이 선전선동 수단으로서 기능을 점차 잃어간 거죠.

김태산: 아, 경제적 하락이 선전선동수단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네요.

기자: 이런 북한의 유선방송의 역사 다음 시간에 계속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

하고 싶은 말 (0)
  • 인쇄
  • 공유
  • 이메일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