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텔레비죤의 역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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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김태산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김태산: 네, 문 기자님 오래간만입니다.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전 시간에 우리는 북한의 선동수단으로서 텔레비죤이 왜 빠르게 대중화되지 못했는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전 시간에도 조금 언급되었는데 오늘은 그 시절 북한의 텔레비죤을 통해 큰 인기를 끌었던 예술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을 놓고 이야기를 계속 나누려고 합니다.

북한의 예술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은 1975년 "조선 2.8영화촬영소"에서 만들어 텔레비죤으로 처음 방영이 되었는데요. 북한에 온 언니는 매우 행복하게 사는데 남한에 온 동생은 미군 승용차가 다리를 깔고 지나가서 장애인이 된…

김태산: 그 자매의 아버지가 남쪽에서 살았는데 어부로 그때에 (북한에) 들어온 걸로 맞죠? 어선이 풍랑으로 북쪽으로 와서 구조를 받아 딸을 만나는 그런 내용이었죠. 참 그때 그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죠. 계급교양자료로 잘 써먹었죠.

기자: 네, 그때에는 아이들의 교과서에도 다 "뛰뛰빵빵 내 동생"이라고 초등학교, 북한에서는 소학교라고 하죠? 그때에는 인민학교라고 했는데 인민학교 2학년 교재에 그게 있지 않았습니까? "뛰뛰빵빵 내동생", 노래처럼 외웠죠. "뛰뛰빵빵 내 동생 무엇을 하느냐? 승리호 자동차 몰고 간대요", 이게 아이들의 놀이 장면인데 "무엇을 실었느냐 물어보았더니 곱고 고운 비단 천에 흰쌀이래요. 어데로 가느냐고 물어봤더니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한국) 어린이들에게 가져다 준대요" 그 동시가 90년대 초까지 교과서에 계속 남아 있었어요. 참 웃기는 거였는데… 그때도 우리는 남한이 어떻게 사는지 몰랐으니까 예술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을 보면서 야, 저 남조선(한국)에서 사는 은희는 얼마나 고달프고 힘이 들까? 언니는 평양에서 유명한 가수가 되고 아주 잘 살고 있는데… 사실 그 영화가 북한의 유명한 가수 최삼숙을 주인공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었습니까?

김태산: 네, 성악배우, 노래배우였죠.

기자: 네, 80년대 최삼숙이라고 하면 정말 대단했죠.

김태산: 아, 그거 북한 예술영화에서 나오는 여성들의 노래는 최삼숙이가 다 부르지 않았습니까?

기자: 네, 맞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한 자료를 말씀드리면 최삼숙은 쌍둥이가 아니었고 남한에 최삼숙의 삼촌이 있었어요. 그럼 삼촌은 못 살았냐? 최삼숙의 삼촌이 바로 남진이라는 가수입니다.

김태산: 그 유명한 남진이라는 그 분인가요?

기자: 네, 60년대부터 70~80년대까지 정말 이름이 난 가수죠.

김태산: 아, 그 가문이 워낙 노래를 잘 하는 가문이었네요?

기자: 네, 그러니까 남진은 엄청 잘 살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 북한에 처음 알려진 한국 노래가 남진이 부른 노래였을 것입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때 북한의 사람들은 그 노래가 해방 전 가요인 줄로 알았지 한국의 노래, 남진이 부른 노래라는 걸 아무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부르긴 불렀어요.

김태산: 그렇지, 불렀어요.

기자: 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나의 님과 한평생 살아가리…

김태산: 그게 고전가요가 아니었군요?

기자: 네, 이게 남진이 베트남전에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남진이 가수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나가 베트남전에 참가했어요. 그때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 아직 새파랗게 젊은 나이었으니까. 그 꿈을 그린 노래가 "저 푸른 초원위에"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선 그런 내막도 모르고 최삼숙에 대해 엄청 동정을 했죠. 아, 저 남한에 있는 최삼숙의 동생은 얼마나 고생할까? 최삼숙은 남한에 있는 동생생각을 하면 밥이 목으로 넘어갈까? 참 우습게도 지난해 북한에서 탈북한 식당 종업원, 중국에 있는 류경식당에서 탈북한 13명의 식당종업원들 가운데는 최삼숙의 딸도 있었습니다.

김태산: 아, 그래요?

기자: 네, 거기에 최삼숙의 딸이 있었습니다.

김태산: 그 딸도 노래를 잘 하는 모양이죠?

기자: 글쎄? 잘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삼숙의 고모 한 분이 영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 분이 평양에 가서 최삼숙을 만났던 소감을 언론에 공개한 것이 있거든요. 북한에서 그렇게 유명한 가수라고 해서 엄청 잘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보니 주변보다 낡은 아파트에서 승강기를 타자고 했는데 전기가 안 와 승강기가 움직이지 못하더라. 그래서 5층까지 되는 건물을 하는 수 없이 걸어서 올라갔다. 그런 걸 언론에 다 썼거든요. 그래서 북한의 배우들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렸는데요. 사실 최삼숙이 같은 배우가 한국에서 살았으면 돈을 많이 벌었다는 정도가 아니겠죠.

김태산: 한국에서 살았다면 돈을 곽지(괭이)로 막 긁어 들이는 거죠.

기자: 네, 그런데 그때 우린 최삼숙을 주인공으로 한 "금희와 은희의 운명"을 보면서 정말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다 눈물을 줄줄 흘렀죠. 저 미국 놈들, 저 식민지 남조선 깡패들, 저 놈들만 없었으면 우리 은희도 행복하게 살겠는데… 참 우리 그렇게 어리석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때 1975년도 5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이 "온 사회의 텔레비죤화"를 정책으로 내놓았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텔레비죤은 많지 않았습니다.

김태산: 그때까지야 많지 않았죠.

기자: 그리고 80년대 중반까지 텔레비죤이 많이 보급됐다고 하는데 그닥 많지는 않았습니다.

김태산: 많지 않았죠.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89년)" 때에 많이 들여다 풀다 나니까 그때 좀 확산됐죠.

기자: 네, 저희는 텔레비죤을 1979년도에 받았어요. 그때 북한은 80년대 중반까지 "대동강"이라는 텔레비죤이 있지 않았습니까? 소련에서 부품들을 들여다 조립생산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북한도 70년대 이후 자체로 텔레비죤을 생산하느라 많이 노력을 했습니다. 그때 보니까 '삼지연', '평양', '보천보' 북한도 여러 가지 텔레비죤이 있었어요. 그 중에서 '평양'이라는 텔레비죤이 제일 좋았고요. 근데 그때까진 전자관 식이었는데 1979년에 처음으로 북한에 반도체(트랜지스터) 텔레비죤이 나왔습니다. 그게 일본의 히타치가 만든 텔레비죤, 그걸 들여다가서 '소나무'라고 이름을 바꾸었죠. 전자관식 텔레비죤은 심할 경우 화면이 켜지는데 2~3분이 걸리는데 이건 켜자마자 화면이 나온다. 그때 대단했죠.

김태산: 평양에서도 텔레비죤을 빨리 놓기 바빴어요. 텔레비죤을 파는 게 없었으니깐. 그러다가 19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때 김정일의 방침에 의해 외화를 풀어 중국에서 텔레비죤을 많이 들여오지 않았어요. 들여다 평양에 거의 차례 졌죠.

기자: 네, 북한이 처음으로 텔레비죤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63년 3월부터이고 김일성이 "온 사회 텔레비죤화"를 선포한 게 1975년 노동당 제5차 대회였습니다. 그러나 텔레비죤을 자체로 생산을 하지 못하고 돈이 없어 외국에서 사들이지 못하다 나니 사실상 1980년대까지 텔레비죤은 대중선전수단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결론은 이런 건데요. 오늘 북한에서 텔레비죤을 통해 예술영화를 보던 추억, 북한이 "온 사회 텔레비죤화"에 결국 실패한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선생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고요. 다음 시간에 이야기를 계속 하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태산: 네, 오늘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