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 창안자는 김일성 아닌 박창만”

워싱턴-변창섭 pyonc@rfa.org
2017.07.25
sci_expo_kim-620.jpg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인민무력성 기·공구, 마감건재(마감재)품 및 과학기술 성과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기자: 북한이 직면한 총체적인 문제점을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살펴보는 ‘북한, 이게 문제지요’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북한 역사에서 7월을 보면, 군대역사와 관계가 있는 날짜가 많은데요. 예를 들면 2012년 당시 북한 인민군을 사실상 지휘했던 리영호가 7월에 숙청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해 7월에 김정은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 역사에서 김정은 시대 들어 인민군의 위상이나 역할이 궁금한데요. 우선 선군정치는 어떻습니까?

란코프: 선군정치는 김정일시대 정치와 사회상황과 직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 선전 일꾼들은 선군정치가 벌써 1930년대 김일성의 항일무장 투쟁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김일성시대에는 선군정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1930년대 중국공산당 군대에서, 그 후에 소련군대에서 군관으로 지내던 김일성이 선군정치처럼 공식적인 맑시즘과 다른 이론을 주장했더라면 곧 살해됐거나 최소한 숙청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숙청은 사실상 죽음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88여단 대대장으로 지내던 김일성 대위는 스딸린 동지, 레닌 동지의 가르침을 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군정치란 김정일 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서 등장한 용어입니다.

기자: 그러면 김정일 통치 당시에 선군정치를 초래한 요인은 무엇일까요?

란코프: 기본적인 이유는 당시의 소련과 동구권 공산 정권 붕괴입니다. 김일성은 1960년대부터 주체사상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공산권의 기본사상인 맑스-레닌주의에 상당히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여러 이유 때문에 북한은 맑스-레닌주의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 국가가 북한에 많은 원조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1970-80년대 김일성은 북한이 더 이상 맑스-레닌주의가 아닌 주체사상만 있는 나라라고 선언했더라면, 소련은 이것을 공산주의 혁명이념에 대한 배신이라고 간주해 이를 규탄하고 북한에 대한 원조를 많이 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가 멸망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공산주의의 위기와 붕괴 때문에 맑스-레닌주의가 세계 어디에도 인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그 사상을 옛날처럼 유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서 북한은 국내에서도 믿을 만한 사상을 평범한 인민들이 믿을 수 있는 사상을 개발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북한은 90년대말 들어서 이미 전에도 많이 간과했던 맑스-레닌주의를 완전히 포기했고,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아주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하지만 주체사상은 김정일 이전인 김일성 시대에 이미 있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맞습니다. 주체사상은 김일성 때 이미 있었습니다. 소련 자료를 보면 1950년대 중반 북한의 사상 발전에 대한 책임자인 박창만이라는 비서가 주체사상을 개발하고, 김일성에게 이 사상을 강조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 말부터 북한은 진짜 주체사상을 많이 떠들기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1990년대 들어와 선군정치를 개발해야 할 이유도 있었습니다.

기자: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란코프: 제가 보니까 이유는 사실상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김정일은 전세계 공산주의가 멸망한 새로운 상황에서 노동당보다 인민군을 더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북한 로동당은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갑자기 무너진 세계 여러나라 공산당과 너무 많이 비슷했습니다. 주체사상은 민족주의를 많이 강조했지만 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정세가 매우 어렵고 불안정하던 1990년대 김정일은 노동당이 아니라 인민군을 통해서 나라를 통치하면 좋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김정일 시대에 로동당 대회는 없었을 뿐 아니라, 로동당의 일부 직위는 빈 자리로 남아 있었고, 로동당의 몇몇 기구는 김정일이 사망할 때까지도 그 기능과 활동을 정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 시대 매년 몇번이나 소집되었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도 사실상 없어졌습니다.

기자: 황장엽 비서의 책을 보면 주체사상이 황 비서의 생각이라고 알려져있는데 실은 박창만 비서였군요?

란코프: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1950년대 말 주북한 소련대사관 자료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소련 외교관들은 북한 정부 내부의 상황을 열심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주체사상을 주장한 사람은 박창만 비서였다고 합니다. 박창만 비서가 주창한 주체사상은 1960년대 들어 황장엽 비서에 의해 많이 발전됐습니다.

기자: 그러니까 주체사상은 박창만 비서가 최초 입안했고, 이를 황장엽 비서가 개발, 완성했다는 말이군요. 방금 김정일이 인민군을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선군정치를 채택했다고 하셨는데요. 혹시 다른 이유도 있을까요?

란코프: 제가 볼 때 김정일의 개인야심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뿐만 아니라 모든 공산권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는 나라를 잘 관리하는 정치인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 사상가라고 주장합니다. 그 때문에 김정일도 선친 김일성이 만든 주체사상과 색깔이 다른 사상을 주창해야 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체사상은 김일성이 만든 것보다 박창만 비서와 황장엽 비서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사실을 알 수조차 없습니다. 아무튼 김정일은 주체사상과는 색깔이 다른 사상을 제안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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