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출판사들과 계약하다

장진성∙탈북 작가
2014.06.10
kyobo_hot_books-305.jpg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 '화제의 도서' 코너.
사진-연합뉴스 제공

홍콩에 있는 에이전트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루 빨리 원고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국에서 돌아온 후 뉴포커스 업무에만 매달려 전혀 원고 준비를 안 한 상태였다. 에이전트는 시 나 소설도 좋지만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수기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본인의 경험이니 구성과 전개가 충실할 것이고 무엇보다 시간적으로 가장 빨리 쓸 수 있는 글이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나는 그때부터 책 구성만 놓고 거의 한 달 가까이 고민했다. 북한체제에 대한 설명은 통전부 경험으로 그려낼 수 있겠지만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서였다. 좋기는 이미 출간한 수기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탈 북 스토리에 중간중간 북한 실상을 섞어가는 식으로 재미와 고발을 다 같이 추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판권이 걸려 있었다. 출판 계약이 5년이나 물려있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법도 사람이 만든 것이란 미련에 일단 만나 호소해보고 싶었다. 더구나 출판사 사장님은 나를 아들처럼 아껴주시는 분이어서 기꺼이 허락해주실 것만 같았다.

역시 그 분은 은사였다. 나는 힘들게 고백했는데 그 분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세계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일인데 잘 써봐, 잘 만들어봐." 그 분의 격려가 집으로 오는 내내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 날 나는 밤을 새며 책상에 앉아 책의 구성을 총 3부작으로 잡았다. 에이전트 말처럼 내 경험을 옮기는 것이어서 1부를 쓰는데 보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부, 3부는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요약만 해서 보내달라고 해서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작성된 원고를 보내고 난 뒤였다.

나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에이전트에게서 메일이 왔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출판사인 영국 랜덤하우스가 내 책을 계약하겠다고 연락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명의 작가와 맺는 첫 계약치고 상당한 액수의 계약금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셜리는 마구 흥분했지만 나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랜덤하우스가 어떤 큰 출판사인지, 또 작가로서 그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알 수 없는 나였던 것이다. 영국 문학축제 때 외국 작가들이 "랜덤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점을 상기시켜서야 나는 겨우 "그게 참 좋은 일이 맞긴 맞는거네."라고 말했다.

나는 세계 영어권 출판계에 유럽판권과 북미판권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썩 후에야 알게 됐다. 몇 개월 지나 미국 사이먼 앤 슈스트 출판사에서도 내 책을 계약하겠다고 연락이 왔을 때는 그게 불법적인 이중계약이 아니냐고 되묻기까지 했던 것이다. 한국 같으면 절대 상상할 수도 없는 출판계약금 지불약속에 내 생애에 분명 큰 변이 나긴 났다고 생각했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눈 앞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 같았고, 내 현실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질 않았다.

그 날 술 한잔 마주하고 고향의 부모님 생각에 울었다. 행복한 눈물이어야 하는데 나에게만 좋은 소식이 무의미해 보여 서러워 울었다. 아니 나의 책이 부모님을 더 고통스럽게 하고 학살할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상상에 무섭기도 하고 죄송해서 너무 슬펐다. 내 자유의 반쪽은 아직도 독재에 억눌리고 유린당한다는 아픔에 원통하기도 했다. 그래서 책 계약이 된 이 날만큼은 며칠 푹 쉬며 사색을 충전하겠다는 계획을 나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아예 술상을 뒤로 미루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밤을 새며 쓰고 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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