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이 3개월의 하나원 과정을 거치고 나면 정부는 임대아파트와 정착지원금을 준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내가 탈북했던 2004년에는 3,700만원, 즉 미화로 3만 7천달러의 정착지원금을 주었다. 임대 아파트는 정부가 저 소득층을 위해 지은 아파트로서 임대 형식으로 지원해주는 것이다. 돈 주고 사는 일반분양 아파트에 비해 평수는 훨씬 작다. 그러나 고향도, 친척도 없는 남한에 빈 손으로 왔는데 먹고 잘 수 있는 집부터 마련해주는 남한 정부가 여간만 감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남한 국민으로 자유의 첫 하루를 맞게 된 날이 바로 2004년 12월 17일이다. 독재의 인민에서 자유민주주의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여서 생일 못지 않게 의미 있는 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향 생각과 두고 온 사람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외로움의 밤이기도 했다. 국정원 직원이 돌아가고 빈 집에 트렁크와 함께 남으니 더욱 간절해졌다.
나 혼자구나! 이 생각에 텅 빈 집이 더 허전하게 보였다. 세상에 혼자라는 말처럼 외롭고 쓸쓸한 단어가 또 어디 있으랴 싶었다. 그때가 저녁 8시였다. 뭐라도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수도꼭지를 틀었다. 당연히 찬물 일 줄로 알았는데 더운 물이 나왔다. 그 온기는 썰렁한 방 안에 홀로 있는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친구 같았다. 나는 샤워를 하자마자 옷을 입었다. 안가에서 나가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온종일 서울거리를 활보하겠다던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였다.
그 열망에 몸이 달아서인지 밖은 춥지 않았다. 아니 평양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리의 눈부신 야경이 12월의 찬 바람마저 덥혀주는 것 같았다. 나는 밤 11시가 넘도록 밤거리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풍요의 불빛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시간까지 사람들이 북적대는 거리의 산만함이었다. 평양처럼 서울도 100만명 군중행사 훈련이라도 벌이는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둘도 아닌 이 수많은 인파가 집에도 못 들어가고 야심한 밤에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았더니 손에 행사 훈련 꽃을 든 사람도 없었고, 옷 차림도 단체복이 아닌 가지각색이었다. 그냥 친구들끼리 만나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노느라 늦는 서울의 일상적인 밤이었다.
너무도 부유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워 보였다. 거기에 심취된 나 자신도 행복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급정거하는 차 소리와 함께 욕질이 들렸다. "죽고 싶어? 이 촌 놈아!" 돌아보니 택시기사였다. 내가 신호등을 어기고 도로 한 가운데 서있었던 것이다. 택시기사는 손가락질을 해가며 욕을 퍼부어댔지만 나는 피씩 웃었다. 나도 이젠 대한민국의 당당한 촌놈이 됐구나, 이 생각으로 말이다. 나는 정말 평양 촌놈이었다.
은행에서 개인 통장을 만들어주고 덤으로 카드도 주며 여직원이 말했다. "교통카드로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교통과 카드가 어떻게 됐다구요?" "이 카드로 지하철이나 버스도 탈 수 있다구요." 나는 그 길로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운전기사에게 카드를 주었다. "날 보고 어쩌라구요?" 나는 그때야 남들이 운전석 옆에 매달린 작은 통에 카드를 갖다 대는 것을 보았고 카드란 반드시 그렇게 써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단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고 자리에 앉긴 했지만 공짜로 버스를 타고 가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 어차피 카드체험 승차가 목적이어서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고 말았다. 내리면서 돌아보니 남들이 또 카드를 찍으며 하차하는 것이었다. 그 맨 마지막 사람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금방 버스에서 내릴 때 카드는 왜 찍었어요?" 내 아래 위를 훑어보던 그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몰라요? 그거 안 찍으면 돈 빠져 나가요" 눈 앞이 캄캄해졌다.
자본주의사회는 하품 하는 사이에도 금 이빨 뽑아가는 세상이라더니! 통장에 그나마 있던 돈이 다 빠져나가겠구나. 이 생각에 다리가 떨렸다. 나는 택시를 타고 버스를 쫓아갔다. 그 이유를 묻는 택시기사에게 나는 대답했다. "카드 찍으러 가요" "무슨 카드요?" "교통카드!" 택시기사는 차를 급정거했다. 당장 내리라고 했다. 그날 택시기사가 왜 화를 냈는가를 알았을 때는 나도 평양촌놈인 자신에게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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