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후의 가족상봉

서울-이예진 xallsl@rfa.org
201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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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부부인 조성문 씨와 아내 김영희 씨가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자신의 집에서 아들 재범 군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탈북자 부부인 조성문 씨와 아내 김영희 씨가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자신의 집에서 아들 재범 군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탈북한지 10년이 지나도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을 데려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죠.  탈북자들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는 서울입니다. 사연을 통해 들어봅니다.

이예진: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이예진: 네. 탈북한지 한참 된 분들도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며칠 전 혼자 살고 계시는 50대의 한 남성이 전화가 왔습니다. 그 남성은 한국에서 살다가 캐나다에 가서 3년 정도를 살다가 온 분입니다. 하나원 나오면서 받았던 주택은 캐나다로 가면서 반납했던 터라 지금까지 돌아와서는 작은 옥탑방에서 지내셨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임대주택을 신청했는데 거기에 선정이 되어서 이제 6월경에는 새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기뻐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북한에는 처와 열다섯 살 되는 아들이 살고 있지만 아무리 설득을 해도 한국에 올 생각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새 집을 받고 보니 가족이랑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정작 겁나서 오지 못하겠다고 하니 어떤 때는 이해되기도 하지만 지금은 화도 난다고 하더군요.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모은 돈은 기회가 될 때마다 보내 주다보니 아마도 살만하니까 올 생각을 안 한다면서 이제는 돈을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이예진: 단단히 화가 나셨네요.

마순희: 다른 사람들 같으면 새 가정을 꾸릴 만도 한데 그래도 혹시나 가족을 데려올 수 있을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는 그 분의 심정이 충분히 헤아려지더라고요. 장성한 아들 앞에 당당한 아버지로 살고 싶다는 것이 그 분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탈북을 한다는 것이 목숨을 내걸고 단행해야 하는 거라 본인이 의지를 가지고 오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강요할 수가 없는 거니까요. 무사히 온다면 다행이겠지만 오는 도중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예진: 그렇죠. 그런 부분은 이해가 되네요. 그래도 요즘엔 아예 가족과 다 함께 탈북하거나 한국에 와서 먼저 정착한 후에 가족을 안전하게 데려오는 경우도 많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옛날 90년대 이전에는 탈북경향을 보면 얼마 안 되는 분들이었지만 거의가 남성들이었고 탈북유형도 정치적 이념형 탈북이라 귀순용사라고 불렸죠. 탈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이 아마도 1990년대 후반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북한의 생계수단이었던 배급체계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엄혹한 현실은 수많은 아사자들을 발생케 했습니다. 자고 깨나면 굶어 죽었다든가 가족이 탈북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뿐이었고 직장에 출퇴근하면서도 여기저기서 시체를 보게 되던 때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 중에는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국의 여러 곳에서 불법체류자로 숨어 살거나 정 견디기 힘들면 한국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즉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탈북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먼저 탈북해서 한국에 정착한 가족들이 남아있는 가족들을 데려오는 형태가 많고 또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가족과 함께 동반 탈북하는 이민형 탈북으로 그 유형이 바뀌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원 시절 함께 생활하던 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부모가 먼저 나와서 자녀들을 데려오는 경우도 많고, 또 먼저 자녀들이 정착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앓고 계신 부모를 업어서 탈북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알고 있는 교회의 아는 목사분의 전화가 왔었는데요. 중국에 있는 지인이 물어봐 달라고 해서 전화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하나원 동기의 이름을 대면서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찾아서 중국에 왔는데 혹시 한국에 오지 않았는지 물어보는 전화였습니다. 이름이 같고 워낙 성이 특별한 성인 ‘표’ 씨였거든요.

확실할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연락처를 대줄 수는 없어서 먼저 그 자녀의 이름을 물어 본 후에 그 분에게 연락해서 혹시 자녀 이름이 맞는지 확인했습니다. 그 분도 조금만 자리를 잡으면 자녀를 데려오려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알아서 중국까지 왔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사실 브로커 비용이 엄청나긴 하지만 대부분 북한에서 중국으로 가는 비용이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용은 얼마 안 되거든요. 당장 브로커와 연결해서 아들과 딸을 데려올 수가 있었던 거죠.

이예진: 정말 기쁘셨겠어요. 탈북하는 데 드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가족 단위로 여러 명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마순희: 워낙 위험한 길이라 한꺼번에 떠나지 못하고 한 명씩 떠나는 경우도 있고 온 가족이 한꺼번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하는 모험이다 보니 떠나는 순간부터 도착하는 순간까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그야말로 위험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서도 혹시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 북한의 보위부 요원이나 타지 않았는지, 이 비행기가 정말 한국에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긴장해서 오게 되더라고요.

사실 저는 세 딸과 함께 중국에서 뿔뿔이 헤어져서 4년 반을 살다가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공안의 눈을 피해 숨어살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벌렁 합니다.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공안이 잡으러 온다는 소식 같아서 전화기를 선뜻 잡을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인지 한국에 와서도 몇 년은 집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깜짝깜짝 놀라군 했습니다. 다행히 저와 저의 세 딸들은 한 번도 북한에 잡혀 나간 적이 없었기에 고생한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의 고생은 고생도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온 저의 먼 친척 벌 되는 조카딸이 있는데 자신을 찾아서 두만강을 건넜다는 엄마와 오빠의 생사를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중국에 가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서 건너가려고 했었는데 장마로 두만강이 불어나서 제 기일 내에 다시 가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딸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기다리던 저희 조카가 아들과 함께 자신을 찾으러 갔다는 것입니다. 물이 좀 잦아들어 조선에 나가보니 이미 엄마와 오빠가 자신을 찾아서 강을 건넜다고 하는데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 그 조카를 만난 날 자기 때문에 엄마와 오빠가 잘못되었다고 저를 붙잡고 한참을 목 놓아 울더군요. 혹시라도 이 라디오를 중국에서라도 우리 조카가 살아있어 듣게 된다면, 그래서 한국으로 전화라도 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꿈같은 기적도 가끔은 일어나거든요.

한국에서 정착하고 있는 3만 명이 넘는 우리 탈북자들이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의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한국행을 하다가 도중에 북송된 분들도 많고 악어강이라고 부르는 메콩강과 베트남의 정글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탈북단체들의 모임 때에는 애국선열들과 함께 한국으로 오는 길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분들을 위해서 반드시 묵념을 하기도 합니다.

이예진: 그래서 탈북을 목숨 건 탈출이라고 하죠. 어렵게 탈북했지만, 가족이 뿔뿔이 탈북하면서 생기는 문제도 있다고 하는데요. 다음 시간에 알아봅니다.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이예진: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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