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시작! 추억의 입학

서울-권지연 xallsl@rfa.org
2014.03.06
first_day_305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미동초등학교에서 열린 신입생 입학식에서 새내기들이 담임교사 소개를 앞두고 긴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지난 3월 3일, 남쪽 대부분의 초, 중, 고등학교들이 입학과 함께 새로운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학창시절,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이 날이 언제나 설레곤 했었는데요.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건 생각할수록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신입생들이 몰고 온 싱그러움이 가득한 교정에서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청춘만세>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행에 권지연이고요. 남북 청년들이 함께하는 인권 모임 ‘나우’의 이정민, 김강남, 김재동 씨와 함께 합니다. 오늘 주제는 ‘입학’입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이정민, 김강남, 김재동 : 안녕하세요.

진행자 : 세 분은 봄의 향기를 느끼고 있어요?

이정민 : 갑자기 추워졌어요.

김재동 : 많이 포근해져서 봄이 왔나 싶었는데 갑자기 또 쌀쌀해 졌습니다.

진행자 : 염색도 했네요.

김재동 : 봄을 맞아서 해봤습니다. (웃음)

진행자 : 저도 며칠 전에 친구 딸 초등학교 입학식에 같이 가봤는데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세 분도 입학식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마음이었어요?

이정민 : 떨리는 마음이 가장 컸죠. 두려움도 있었고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입학식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기억에 남는 건 초등학교 입학식입니다. 북한에서는 초등학교를 인민학교라고 하는데요. 가면 들어가자마자 4열 종대로 행진을 해요. 1학년 입학식을 그렇게 들어가서 시작을 하는데 손과 발을 맞춰야 하는데 항상 손과 발이 같이 나가서 저희 엄마가 그걸 못하냐고 너무 민망해하곤 했습니다.

진행자 : 옆에서 재동 씨가 웃음을 못 참는 걸 보니 본인도 경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재동 : 저는 군대 갈 때 훈련소에서 제식 훈련을 할 때 손과 발이 같이 움직여서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생각나네요.

진행자 : 강남 씨의 기억에 남는 입학식은 언젠가요? 김강남 : 어릴 때 엄마하고 학교에 손잡고 갔던 기억이 제일 남습니다. 왜 이 기억이 특별하냐면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한국에 왔거든요. 그 이후로부터 제가 혼자서 모든 입학식을 가고 그래서 엄마에 대한 기억이 있는 입학식은 그 때가 유일합니다. 저는 4열 종대는 잘 했었는데 대신 신발을 짝짝이로 잘못 신어서 오른발에 왼쪽 신을, 왼발에 오른쪽 신을 신었습니다. (웃음)

첫 입학식은 정민 씨와 강남 씨에게도 참 소중한 추억이네요. 물론 서툴고 실수투성이라도 말입니다.

남쪽의 입학식은 제가 입학을 하던 30년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진행자 : 재동 씨도 잘 모르죠? 남쪽은 저 입학 할 때만 해도 1학년들이 하얀색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입학 했었거든요.

김재동 : 처음 듣습니다.

진행자 : 처음 들어요? 세대 차이가 확 나는데요?

이정민 : 북한도 그런 게 있어요. 여자 애들은 카프론 수건이라고 있어요. 나일론 비슷한 섬유의 빨간 천을 리본으로 해서 머리에 달았습니다.

진행자 : 그건 장식용인 거잖아요. 저희 때는 코흘리개들이 많아서 손수건을 달았던 거예요. 요즘은 코 흘리는 아이가 없잖아요.

진행자 : 재동 씨도 초등학교 입학식을 저와는 무척 다른 분위기에서 했을 것 같은데 어떤 기억이 있어요?

김재동 : 저는 입학식 전 날 아버지가 견출지를 공책에 모두 붙여 주시고 이름을 쓰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입학식을 갔는데 교장 선생님 말씀이 너무 길어서 다리만 아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행자 : 입학식 날 막상 선생님이나 짝꿍이 맘에 안 들어서 울어 본 적 없어요?

김재동 :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예쁜 선생님이 되셨으면 했는데 할머니 선생님이 돼서 무척 속상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실수 속에 지나갔던 인민학교 즉 초등학교 입학식과 달리 중학교 입학 할 때는 꽤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행자 : 중학교 입학식 하면 또 다른 느낌이 들잖아요? 내가 어른이 되는 느낌? 저는 그런 느낌으로 입학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정민 : 북한은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식에 대부분 부모님이 안 따라가요. 애들만 가서 하는 건데 입학식이라고 할 것도 없고 반에 가서 앉으면 시작됩니다. 중학교 입학식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농촌에서 살다가 시내로 오다 보니까 친구들이 왕따 같은 걸 시켰던 기억이 나요. 딱 들어가면 첫 눈에 느끼게 됩니다. 쉬는 시간에 애들이 줄넘기 같은걸 하는데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고무줄이 없어서 줄넘기를 못 배웠어요. 그래서 끼지를 못 하는 거죠. 그래서 슬펐었는데 들어가자마자 시험지를 나눠주면서 인민학교 과정에 대한 시험을 봤어요. 거기서 다행히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반의 간부를 했었어요.

진행자 : 역시 어릴 때부터 총명했군요.

이정민 : 그것 때문에 기가 좀 살았었죠. (웃음)

진행자 : 정민 씨가 얘기하는 도중에 강남 씨가 본인도 할 말이 있다는 눈빛을 막 보내네요.

김강남 : 초등학교 때는 몰랐어요. 그런데 중학교 올라가니까 남자들은 누가 힘이 더 세나, 싸움에서 누가 이기나 그런 기 싸움이 있더라고요. 저는 도시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집이 망하면서 시골 학교에 가게 됐는데 학교에 가니까 이상하게 보고 시내에서 온 애라고 무조건 왕따를 시키려고 하더라고요.

진행자 : 재동 씨는 좀 생소하죠?

김재동 : 중학교 때부터 그런 기 싸움? 생소 합니다.

이정민 : 그 기 싸움에서 꼭 살아남는 아이들이 있는데 덩치가 큰 애, 그리고 유급한 애들인데요. 그런 애들한테는 함부로 접근을 못해요. 그래서 엄마들이 일부러 유급을 시키고 그러기도 했어요. 저희 반에도 유급생이 있었거든요.

진행자 : 저는 중학교 입학식하면 교복이 기억나요. 남쪽은 학교마다 교복이 다른데 북한은 어때요?

김강남 : 북한은 전국이 같아요. 국가에서 교복을 아주 싸게 국정 가격으로 줘요. 예를 들어서 시중에서 파는 교복이 천 원 정도면 백 원 정도에 줍니다. 진짜 저렴한 거죠. 그리고 교복을 여자들은 치마 주름을 칼날처럼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요. 한국은 치마를 짧게 입고 줄여서도 입던데 북한엔 그런 건 없었어요. 아예 허용이 안 됐어요. 남자도 바지 주름과 목 달개를 항상 하얗게 달면 좋은 거였죠.

진행자 : 저는 교복이 마음에 드는 학교에 배정받고 싶어서 그 근처로 이사 가겠다고 그랬었습니다. (웃음) 그런데 북한은 그럴 고민이 없는 거네요. 재동 씨는 교복 안 입었어요?

김재동 : 물론 입었죠.

진행자 : 입었죠? 아주 크게 맞춰서... (웃음)

김재동 : 저는 중학교 입학 당시에 무척 비장한 마음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배정을 받았던 학교가 남대문 중학교라고 무척 엄격한 학교로 소문나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죽었다. 공부나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그 학교 교복이 남색 상의에 바지는 청바지였어요. 그런데 청바지가 너무 튀어서도 안 되고 탈색을 지나치게 해서도 안됐습니다.

진행자 : 그런데 항상 교복을 3년 내내 입으라고 아주 크게 맞춰주잖아요? 저는 졸업할 때까지 큰 교복 입었습니다. 별로 안 자랐거든요.

이정민 : 그건 남과 북이 똑같은 거 같아요.

진행자 : 북한도 그래요?

이정민 : 네, 바지는 좀 덜한데 치마를 접어서 입혀요. 그런데 주름치마인 경우에는 접은 부분이 주름이 안 잡혀요.

진행자 : 저도 그거 뭔지 알아요.

이정민 : 정말 마지막 졸업 할 때까지 접힌 부분이 다 쓸어서 펴서도 못 입을 정도였어요...

학교는 우리가 사회에 나오기 전에 경험하는 첫 조직 생활인만큼 학교에서의 경험들은 무척 소중하고 중요한데요. 안타깝게도 정민 씨와 강남 씨는 꼭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김강남 : 서열 같은 게 있었어요. 첫 째는 잘 사는 집 아이들, 그리고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 또 한 가지는 공부 잘하는 거. 순위가 제일 마지막이 공부 잘 하는 겁니다. 저는 돈도 없었고 공부도 못했어요. 그래서 운동 하는데 집착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정민 : 저는 체육 담당 위원이라는 걸 했었는데 선생님한테 엄마가 엿을 가져다 줬었어요. 그러니까 그걸 시켜 주더라고요. 북한에 촌지 같은 게 있어요. 선생님한테 물건이나 돈을 많이 가져다주면 분단 위원장이 될 수도 있고 그랬습니다. 여기처럼 학교에서도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거를 하지 않거든요. 그냥 선생님이 정해주면 그 사람이 무조건 하는 거니까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엄마들이 무척 노력을 했죠.

진행자 : 자, 입학식이 한창인 때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딘가에 입학을 할 일이 거의 없죠?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요?

이정민 : 한국에 와서 학교에 입학하는 탈북 청년들이 많아요. 북한에서 탈북 대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 하시는 청취자 분들도 많을 텐데 대학교라는 것은 정말 자율적인 곳이에요. 선생님이 해라, 하지 마라 하는 건 절대로 없어요. 그래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틀이 있다 해도 그에 대해서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다른 학생들과 비교도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는 환경도 바뀌고 그러니까 많이 의식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데 그런 고민이 오히려 저를 힘들게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냥 편하게 하면 되는 건데요. 이제 제가 2학년인데 새로 들어오는 후배들에게 비교 대상이 아닌, ‘소중한 나’라는 인식을 갖고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재동 : 탈북 청소년들은 전혀 다른 환경을 접하게 되는 거니까 정신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을 겪고 있을 겁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맘을 열고 자신이 잘하는 부분을 남들에게 편하게 보여 줬으면 좋겠습니다.

김강남 : 북한의 모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머지않아 통일이 된다면 지금은 서로 다른 교복,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한 모습으로 한 마당에서 입학식도 하는 날이 올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진행자 : 오늘도 감사합니다.

이정민, 김강남, 김재동 : 감사합니다.

뭐든 신기하고 새로웠던 첫 입학식 날의 그 느낌을 기억하십니까? 삶이 조금은 지치고 무료하다면 신입생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면 어떨까요? 오늘 <청춘만세>는 여기까집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권지연 이었습니다. 함께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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