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스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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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이 6년 차입니다. 도착한 다음해 아들도 데려와 지금은 엄마로 또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은 소연 씨가 북한을 떠나 남한이라는 세상에서 보고 겪은 경험담을 전해드립니다. 남한의 신기한 세상만사를 얘기하다고 보면 떠오르는 고향의 추억들도 함께 나눠 봅니다.

INS - 저희는 학교 때 교사와 학생이 불구대천의 원수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주의라는 게 교원에게 배급, 노임을 이런 걸 제대로 안 주니 선생님들도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죠.

남한의 5월 15일 스승의 날을 지나면서 남과 북, 우리가 만난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소연 씨, 문 기자 모두 본인들의 학창 시절 그리고 학부모의 입장으로 만난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 대부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번 만난 좋은 스승이 수 만 가지의 나쁜 기억들을 덮어주는 것 같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지난 시간에 이어 남북의 스승, 선생님들에게 대한 얘깁니다.

진행자 : 집이 가난해 선생님한테 미움 받고... 이런 상황이면 선생님에 대한 존경 같은 게 생길까요?

박소연 :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정말 좋은 선생님들은 계세요. 지금 문 기자 정도의 연배였어요. 저희가 등산을 갔는데 못 사는 집 아이들이 강냉이밥이랑 입쌀이 섞인 밥을 싸왔어요. 선생님 도시락 같은 건 따로 싸오는 엄두도 못 내고... 동그랗게 모여서 한 학급씩 도시락을 먹는데 못 사는 아이들이 한데 모여서 밥을 먹는 겁니다. 도시락 뚜껑을 열기가 부끄러우니까 3분의 1만 열어놓고 먹어요. 다른 아이들은 떡이고 계란이고 있으니까 다 보라는 식으로 활짝 열거든요. 그 선생님 이름이 노제갑이었나? 살아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자~ 보자, 너희들 뭐 싸왔는지... 웃으면서 말씀하셨는데 한쪽 구석에 모여 앉은 여섯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은 어깨가 잔뜩 이렇게 움츠러들고... 선생님이 당신이 받은 도시락을 그 아이들에게 주셨어요. 그리고 그게 학교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고 나중에 그 아이들은 군대 갔다와서도 선생님 집에 다녔고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그 선생님네 집이 굶어 죽게 됐는데 얘들이 선생님네 집에 낱알을 갖다 주고 했답니다. 그 집에는 노부모도 있었고... 근데 그 선생님의 얘기가 계속 입소문이 났어요. 그 이후에도 얘기가 되고... 근데 그 선생님은 정말 못 살았어요. 바지 꿰진 것 입고.

문성휘 : 우리 때 선생님은 못 사는 아이들을 굉장히 잘 봐주셨어요. 힘들지 않냐, 뭘 먹고 나왔냐 물어도 보고. 우리 학급에 정말 힘들게 사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걷지 못 하고 아버지가 그저 노동자였고. 사는 게 정말 힘들었는데 형제가 남자가 둘이었고 한창 많이 먹을 나이에. 새 학기가 시작됐는데 12과목 공책을 좋은 걸 해서 주더라고요. 그 아이는 학급에서 왕따 비슷했고 아이도 굉장히 주눅이 들어있었는데 선생님이 하도 이 아이한테 관심이 높으니까 같은 반 친구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절대 아이들을 때리지 않았어요. 대신 화가 나면 교편대로 책상을 때리는데 가끔 그게 부셔져 버리곤 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선생이 그러다가 중간에 남편 따라 어디 다른 도시로 전근을 가게 됐는데 그날 마지막 수업에 선생님도 울고, 학부모들도 울고.

진행자 : 그렇지만 대부분의 선생님이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도 되겠죠?

박소연 : 그렇죠. 안 그런 선생이 더 많죠.

문성휘 : 내가 졸업을 할 때까지 선생이 5번, 6번 바뀌었어요. 그런데 내가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저를 2년 동안 가르켜준 그 선생님입니다. 제일 기억에 남아요. 아직도요. 마지막 가는 날 선생님, 학부모들도 너무 울어서 오히려 우리는 좀 뻘쭘하게 있었던 기억이 나고요... 아, 정말 그런 선생님이 많았으면 좋겠는데요...

박소연 : 아휴... 사실 안 그런 선생님이 더 많죠. 제가 아이를 남한에서도 학교를 보내고 북한에서도 보냈지만 북한에서 학교 보낼 때는 학교 선생님을 길에서 만날까봐 두려웠어요.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얘가 수업 시간에 종이쪽지를 갖고 집으로 뛰어옵니다. 쪽지에는 '교육부에서 검열 왔는데 고양이 담배 두 갑 부탁합니다'. 고양이 담배 한 갑이면 입쌀 두 킬로 가격이거든요?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매대에 가서 써장, 외상이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외상 당겨서 보내면 그게 한 주일 있다가 또 옵니다... 제가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데 무슨 능력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집에 갔는데 엄마가 없었다 하라고 아이에게 거짓말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윗동네에 사니까 가끔 길에서 마주치거든요. 그러니까 저기 선생님만 보이면 제가 홍길동처럼 사라지고 그랬습니다. (웃음) 그런데 한국에 와서 아이를 학교에 넣고는... 정말 선생님을 한 번도 만나보질 못 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좀 뵙고 싶은데, 여기 선생님은 담배 달라는 소리 같은 건 안 하니까...(웃음) 그때는 아이가 학교에서 오기만 하면 내가 오늘 니 선생님을 길에서 볼까봐 간이 콩알만했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게 참... 열 번 들어주다가 한번 들어 못 주면 그렇게 피해다니고 아이에게 피해가 갈까봐 걱정이 되고 그랬죠. 참 같은 선생님도 이렇게 다릅니다.

진행자 : 북쪽도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세잖아요? 남쪽도 만만치 않거든요. 그 바람을 잠재우고 선생님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학교에 오지 못 하게 하는 등 남한 학교에서도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박소연 : 학교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핸드폰으로 연락이 오더라고요. 몇일 날에 자원봉사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진행자 : 그런 특별한 일정이 있을 때만 갈 수 있지 용건 없이 학부모들이 학교에 오는 걸 학교에서 환영하지 않아요. 일 년에 두 번있는 담임선생님 면담 때만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요.

박소연 : 저는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저는 이제 또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올라갔잖아요?

진행자 : 중학교는 또 다르죠?

박소연 : 그렇죠. 저는 사실 은근히 걱정을 많이 했어요. 서울 한복판의 좋은 중학교를 가면 아이들도 그렇고 선생님도 걱정이 되더라고요. 근데 아이가 학교에 배정됐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선생님이 먼저 혁이를 맡겠다고 얘기를 했답니다. 먼저 선생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셔서 그렇게 설명해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학교 체육 대회에서 1등 하려고 애를 맡았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웃음) 제가 사실은 할아버지가 평양 출신이고 실향민 가족입니다. 그래서 문서를 보는 순간 이 아이는 꼭 내가 맡아야겠다, 이 아이에게 잘 해주고 싶다 그래서 맡게 됐다고요.

진행자 : 혁이는 대체적으로 운이 좋네요.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문성휘 : 그러네요. 사실 인생에서 많은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좋은 스승은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방황과 실패, 좌절감, 고통, 고난, 가슴을 찌르는 독설... 우리 인생에서 좋은 스승이랍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에서 스승들을 이미 많이 만났죠?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좋은 스승은 시간이라고 하네요.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진행에 박소연, 문성휘,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