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안녕하세요. <통일로 가는길>의 노재완입니다. 오는 9월 8일은 한반도 최대 명절인 추석입니다. 한국의 경우 추석 때 많은 사람이 고향에 갑니다. 그러나 고향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북 실향민들입니다. 이들은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고향 사람들끼리 모여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망향의 한을 달래기도 하는데요. 이번 주 <통일로 가는길>에서는 탈북자와 함께하는 실향민들의 송편 빚기를 전해드립니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자락. 이곳에 이북 실향민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각종 행사가 열리는 통일회관이 있습니다. 통일회관에는 이북의 각도 사무실이 있는데요. 지금도 6.25전쟁 당시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5개 도가 있는데 합쳐서 이북5도라고 부릅니다. 또 개성과 개풍, 장단 등 경기도와 북한 지역에 있는 강원도까지 포함하면 모두 7개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이곳 사무실에서 전국의 이북 실향민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행사 일정도 안내해줍니다.
실향민 대표기관인 이북도민회중앙연합회 김동윤 부장의 말입니다.
김동윤 이북도민회중앙연합회 부장 : 일반인들은 이곳을 이북5도청이라고 부르는데요. 사실 정식 명칭은 통일회관입니다. 우리 실향민들에게는 둥지 같은 곳이죠. 고향 사람들과 만나서 회의하고, 친목회도 열고 그렇습니다.
실향민 하면 보통 북한 지역에 고향을 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에게 청춘은 아픔 그 자체입니다. 전쟁 때 월남해 갖은 고생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 가족을 북에 두고 온 사람들의 경우 가족을 잃은 슬픔까지 견뎌야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 통일회관에는 거의 노인들뿐입니다. 실향민들의 노령화가 심해지면서 이젠 70대를 넘어 8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60대가 ‘청춘’ 대접을 받을 정도입니다.
김동윤 이북도민회중앙연합회 부장 : 실향민들은 청춘을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을 위해 바쳤고, 또 6.25를 겪으면서 나라를 지키는 데 힘썼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가족의 정을 잊지 못하고 이북 고향에 다시 가겠다는 신념 하나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 바로 지금 80세의 실향민들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지난 9월 2일 통일회관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추석 맞이 송편 빚기 행사입니다. 이날은 특별히 탈북자들도 함께했는데요. 행사가 열린 통일회관 5층 대강당은 오랜만에 웃음꽃이 폈습니다. 월남한 시기는 다르지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이북5도새마을부녀회 노정심 회장의 말을 들어보시겠습니다.
노정심 이북 5도새마을부녀회 회장: 우리가 소중한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 1세대들이잖아요. 그래서 탈북자들의 그 아픈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가족과 떨어져서 사는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또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면 정도 더 돈독해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80이 넘은 고령에도 송편 빚는 솜씨는 여전했습니다. 빠른 손놀림으로 만든 반달 모양의 송편이 어느새 쟁반 가득히 채워집니다. 또 한쪽에선 이미 노릇하게 익은 송편이 나오고 있고, 실향민들은 다 익은 송편을 가져와 나눠 먹으며 정을 나눴습니다.
이날 송편 빚기 행사에 참여한 올해 83세인 나옥인 할머니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면 금릉리가 고향이라면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할머니는 19살 적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다행히 가족들이 함께 다 내려와 이산의 아픔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나옥인 : 황해도 금천은 개성에서 70리 떨어져 있습니다. 6.25전쟁이 나고 서울로 다 왔습니다. 6.25 때 아버지와 오빠들은 이미 서울에 있었고요. 1.4후퇴 때 오빠들이 차를 갖고 와서 언니와 저를 태우고 갔습니다. 고향에서 언니는 은행에 다녔고, 저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몸이 아파 병원에 있었습니다. 처녀들이니까 언니와 저만 차를 태우고 간 거죠. 그리고 어머니와 남동생 2명은 바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나옥인 할머니는 결혼하면서 남편 때문에 이산가족의 한을 알게 됐습니다. 남편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6.25전쟁 때 혼자서 월남했습니다. 명절이 되면 남편은 북에 두고 온 혈육 생각에 그리움이 사무쳤습니다.
그래서 추석과 설에는 어김없이 북녘땅이 보이는 임진각을 찾아 차례를 지냈습니다. 올해 90살인 남편은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고 싶다”며 지금도 옛노래 ‘고향무정’을 자주 부른다고 합니다.
(노래 고향무정)
나옥인 : 우리집 아저씨는 고향에 가서 죽겠다고 자주 말했어요. 죽어도 고향 가서 죽어야지.. 고향에 부모님과 형님이 계셨다고 했는데 부모님이야 돌아가셨겠죠. 그리고 형님도 아마 돌아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할머니는 1953년 한반도가 나뉠 때도 분단은 오래가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습니다. 몇 년 안에 다시 통일돼 고향으로 돌아갈 거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주변에 사람들이 세상을 계속 떠나면서 이러한 희망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나옥인 : 저희는 금방 내려갈 줄 알았죠. 여기 와서 살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집이 이북에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계속 길어지니까 체념했죠. 그래서 할 수 없이 여기서 직업을 갖고 결혼도 하게 됐습니다.
실향민들과 함께 모여 앉아 송편을 빚던 탈북자들도 고향에서의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2년 전 탈북해 한국에 온 청진 출신의 김혜숙(가명) 씨의 말입니다.
김혜숙 : 명절 준비하기가 참 어렵죠. 북한에는 쌀부터 시작해서 고기 이런 게 다 부족하잖아요. 그래서 쌀 1kg 정도만 떡을 만들고, 나머지는 옥수수를 국수 기계에 넣어서 떡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러니까 차례상에 올릴 것만 쌀떡으로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북한에도 ‘송편을 잘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는 말이 있어 여성들은 송편을 빚을 때 온 정성을 기울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송편은 남한의 송편보다 크기에서 차이가 납니다.
김혜숙 : 모양은 차이가 없는데요. 크기에서 여기 남한 것보다 3배 정도 더 큽니다. 북한은 먹는 게 부족하다 보니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는 것이 가장 큰 예우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열심히 송편을 빚던 김 씨가 갑자기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북에 남아 있는 가족 생각 때문입니다. 김 씨는 명절이 다가오니 북에 있는 가족 생각에 외롭고 쓸쓸하지만, 실향민 어르신들 덕분에 따뜻한 정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김혜숙 : 이렇게 실향민 어르신들과 저희 탈북자들이 한 번 모이면 외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을 통해 이분들이 정착과정에서의 어려움 등을 직접 말씀해주시니까 솔직히 많이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도 이분들과 오늘 떡을 빚는 것처럼 함께 통일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분단 이후, 다수의 실향민들은 해마다 추석이 되면 북녘땅이 바라다보이는 파주 임진각에 부모와 조상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차례상을 올렸습니다. 또한 올해부터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선배 실향민들을 위해 따로 추모제도 개최할 예정입니다.
김동윤 이북도민회중앙연합회 부장 :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며 통일의 그 날을 기다리다 돌아가신 분들이 지금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안치돼 있습니다. 그분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차원에서 도민연합회에서 올해 처음으로 동화경모주간 행사를 하게 됐는데요. 합동제례식은 물론 분단의 아픔과 6.25를 되새기자는 의미에서 사진전도 1주일간 열 예정입니다.
정겨워야 할 추석, 실향민들과 탈북자들은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추석 당일, 북녘이 바라다보이는 휴전선 일대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입니다.
특히 고령의 이북 실향민들에게는 더는 기다릴 시간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향 땅을 눈앞에 두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실향민의 심정, 그 망향의 한을 풀 수 있을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길 기대하면서 <통일로 가는길>, 오늘 순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