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이 번역한 조선왕조실록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5.08.07
chosun_dynasty_history_b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사진-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남북한 학자들이 힘을 합쳐서 장점은 살리고 결함은 고치는 일을 함께할 시기가 오기를 /우리의 선조들이 그렇게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미래에 살게 될 후대들이 역사를 통해서 배움으로써 더 훌륭한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을 바라서였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은 최근 조선왕조실록 번역사업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 400책이 번역되어 완간된 것은 1991년 12월이다. 이는 한국에서 1993년에 총 413책으로 번역, 완간한 것 보다 앞선다. 사업착수로 첫 번역본이 나온 것은 한국 쪽이 앞서지만 끝마친 것은 북한이 먼저이다. 물론 단순 비교가 어려울 만큼 사업주체, 사업내용(번역대상, 번역범위, 번역원칙, 체재)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두 민간기관이 사업주체였고 북한은 국가연구기관(리조실록 번역실,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실)이 사업주체였다. 무엇보다 번역대상 원본이 다르다. 한국은 태백산 사고 본, 북한은 적상산 사고 본(赤裳山 史庫本) 이었다.

이 적상산 사고 본은 6․25때 서울에서 반출된 것이다. 광복당시 서울에는 실록 3질이 있었고 그중에 장서각 소장 실록이 6․25때 없어졌다. 그 한 질이 북한으로 간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리조실록>은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남조선에서 가져온 것이다”(조선대백과사전 8권, 백과사전출판사, 1999. p 226). 북한은 한동안 『이조실록』이 ‘임진조국전쟁’ 때 전주에서 묘향산 불영대로 이전, 보관한 것이라고 해오다가 왕조실록 번역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자기들의 실록이 서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자신감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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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욱 선생은 맺는 말에서 전쟁 중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물건을 빼앗아 가는 것을 약탈이라 하지만, 북한이 실록을 북으로 가져간 것은 약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일조상의 문화유산을 가져간 것이라 할 때 반출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반출해 간 실록을 두고 김일성이 말한 것처럼 주인 손에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면 남쪽 학자들은 실록이 소용없는 사람들인가?

일설에 의하면 이 반출을 가장 주장한 것은 경제사학자 백남운(白南雲)이였다지만 어디 백남운뿐이겠는가, 실록의 존재와 가치를 아는 모든 북한학자들이 탐내었을 것이니 실록확보가 북한학자들로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빼앗아 갔던, 반출해 갔던 간에 어떻든 이를 번역해낸 것은 민족문화사의 큰 기여로 된다.

남북한 각기의 번역에는 장점과 결함들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남북한이 힘을 합쳐 장점은 살리고 결함은 고치는 일을 함께 할 때까지 그것들은 계속 고쳐져야 할 것이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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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은 남북한의 조선왕조실록 번역 사업을 이렇게 비교합니다.

임채욱 선생: 북한은 1958년 9월 실록을 공개하는 전시회를 열고는 이를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제 본격적으로 착수된 것은 1970년 10월입니다. 홍기문이라는 학자가 주관하는데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소설 임꺽정을 지은 홍명희의 아들이죠. 그래서 그 번역이 완전히 끝난 것은 1991년 12월이죠. 이것은 한국에서 완전히 번역사업을 끝낸 1993년보다는 앞서지요. 번역하면서 김일성 지시대로 어지간하면 원문을 다 살리는 방향에서 했고 말도 쉬운 말로 하도록 해서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읽기에는 편하게 했다는 특징이 있지요. 반면에 한국에서 번역한 것은 용어도 풀어서 번역하기보다 그대로 했기 때문에 공부하는 학자들에게는 정확해서 좋은데 일반인들에게는 좀 어렵겠지요.

조선왕조실록 1질이 북한으로 넘어감으로써 북한에서도 번역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평가입니다.

임채욱 선생: 같은 조상의 것을 가져갔으니 반출해갔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엄연히 관리하는 주인이 있는데 전쟁 중에 가져갔다면 반출이 아니라 탈취이거나 약탈이라 하겠죠. 그런데 그걸 가져간 뒤 김일성 하는 말이 이제야 실록이 주인을 만났다는 말을 하는데 그렇다면 남쪽의 학자들은 실록이 없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어떻든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과 6.25전쟁, 두 번의 전쟁 때 정말 없어 질뻔한 위기에서 살아남았지요. 이것을 북한이 약탈해 갔던 탈취해 갔던 반출해갔든 간에 그것을 그래도 번역을 해낸 것은 민족문화사의 기여라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북한에서 각기 번역한 실록은 장점과 결함들이 있을 것이므로 앞으로 남북한 학자들이 힘을 합쳐서 장점은 살리고 결함은 고치는 일을 함께할 시기가 오기를 바랍니다.

북한이 조선왕조실록을 6.25 전쟁 이전에도 가져가려고 시도한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임채욱 선생: 네. 6.25 이전에도 남쪽에서 왕조실록을 북을 가져가려고 시도한 일이 있는데 그 중심에 월북한 경제사학자 백모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 이름은 백남운입니다.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주로 우리나라 경제사 연구에 업적을 남긴 학자죠. 광복 후 학술원 설립을 주도하다가 1947년에 월북했습니다. 월북 후에는 북한의 대의원도 했지만 주로 교육, 학문 분야 책임자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 백남운이 실록을 북한으로 가져가려고 시도한 중심인물이라고 지목받게 된 것은 1949년 11월 남한 경찰에 잡힌 실록 절도범이 백남운 비서였기 때문이었고 그 비서 말이 백남운이 자기를 남하시키면서 조선왕조실록을 훔쳐서 북으로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한 것이지요. 그리고 창경궁 안에 있는 장서각에서 실록을 훔쳐서 숨겨둔 곳을 찾아냈는데 그곳이 백남운 동생인 백남교 란 사람 집이었지요. 이렇게 해서 북한으로 갈 뻔했던 실록이 살아남았다가 6.25 때 결국 북한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에 있던 왕조실록을 지켜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자세한 활동과 그 원본은 어디 어디로 이동한 것인지!

임채욱 선생: 한마디로 말해서 이 두 선비가 아니었으면 조선 전기의 역사자료가 남아 있지 못했겠지요. 왜군이 전라도로 쳐들어오기 위해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에 왔을 때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을 어떻게 할까? 걱정이 태산같을 때 정읍에 살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은 자기들이 돕겠다면서 나섰지요. 이들은 자기 집안의 머슴 30여 명을 동원해서 전주로 가서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과 다른 전적들을 50여 개의 궤짝에 넣어 내장산으로 옮깁니다. 소달구지로 옮기겠지요. 처음에는 내장산 은봉암에 옮겼다가 다시 비래암으로 옮기고 또 용굴암으로 옮겨 보관하게 됩니다. 얼마 뒤 다시 비래암으로 옮깁니다. 그 두 선비는 직접 실록을 지킵니다. 이때 이들 나이는 안의 64세, 손홍록 56세입니다. 내장산에서 1년을 머물었던 실록은 이듬해 1953년 7월 경기도 부평을 거쳐 강화도롤 들어갑니다. 강화도에서 해주로 옮겨갔다가 안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까지 갑니다. 그 뒤 이 실록은 다시 강화도 마니산으로 옵니다. 강화도에서도 다시 정족산으로 옮겼다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관에 보존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가 이를 대상으로 기록문화유산으로 정한 것이지요.

조선왕조실록이 매우 정확하다고 합니다. 그 편찬과정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면?

임채욱 선생: 조선왕조실록은 역대 국왕 사후에 전 국왕 시대에 기록해둔 역사사실을 편찬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국왕이 죽으면 실록청을 설치하고 실록청에는 영의정 이하 주요관리들이 영사, 감사, 수찬관, 편수관 등 등의 직책을 맡아 실록편찬을 공정하게 진행하게 됩니다. 우선 사관들이 기록해둔 사초를 근거로 해서 다른 여러 자료들도 참고하게 되는데 가령 각 관청의 일기, 시책들의 집행기록 등도 해당이 되지요. 한가지 특기할 것은 조선시대에 책이 편찬되면 대부분은 왕에게 바쳤지만, 실록만은 예외였다고 합니다. 편찬이 다 됐다는 보고는 왕에게 하지만 왕이 보지는 못합니다. 세종대왕도 실록을 보고 싶어했지만, 신하들이 못 보게 만류했다지요. 그래야만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들이 독립성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자유아시아방송의 칼럼니스트 탈북자 출신 김현아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에 관해 이렇게 들려줍니다.

김현아: 왕이 통치하는 시대에 신하들이 왕의 의사와 반대되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왕과 함께 일한 사람들이 모두 사망한 이후에 실록을 작성해야 공정하게 역사를 편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선비들이 있었다는 것도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김현아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이 주는 오늘날의 큰 의미도 들려줍니다.

김현아: 우리의 선조들이 그렇게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미래에 살게 될 후대들이 역사를 통해서 배움으로써 더 훌륭한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을 바라서였을 것입니다. 후대들을 생각하며 역사를 기록해 온 선조들 앞에 너무도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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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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