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를 보는 눈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7.09.01
koryo_russia_moving_b 전남도교육청의 특색교육 활동인 '전남 독서토론 열차학교' 학생들이 지난 7월 러시아 우수리스크 라즈돌노예역에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기억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북한 역사책이나 자료에 이 고려인 강제 이주와 관련된 기사는 없습니다. 소련 공산정권시절 스탈린이 명령한 이 일을 두고 북한이 언급하기는 어렵겠지요.

9월입니다. 긴 여름도 꼬리를 내릴 때가 돼 가는 것 같습니다.

임채욱 선생: 네. 그렇습니다. 아직 노염(老炎)은 남았지만 여름이 가면 도시를 벗어난 교외 빈 들판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책 읽을 등불을 점점 가까이 하게 되는 계절이 찾아오겠지요. 이때를 등화가친(燈火稍可親)의 계절이라 하지요.

오늘 이 시간에는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9월에 있었던 한민족의 현대사 사건 한 가지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1937년 9월 러시아 땅에 살던 우리 고려인들 17만 명이 강제로 중앙아시아 땅으로 이주 당한 그 슬펐던 사건 말입니다.

임채욱 선생: 정말 눈물 나는 사건이었습니다. 1937년이면 러시아 땅 연해주에는 일본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피해서 모여든 수십 만 명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공산주의 정권이 지배하던 소련이였지요. 1937년 9월 소련당국은 우리 동포들에게 사흘 치 먹을거리만 지니게 하고 집합시킵니다. 그리곤 기차, 그것도 창문도 없는 화물열차에 태워 한 달이 넘게 6,500km를 갑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땅에 던져집니다. 그 곳이 오늘날 카자크스탄이고 우즈베키스탄입니다. 그땐 이 지역이 소련 16개 연방국가이던 시절 이였지요. 집도 없는 들판에 내려진 우리 동포들이 처한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라를 잃어서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좀 살려고 했더니 이렇게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생목숨 끊지 못하고 그 땅에 토굴을 파고서라도 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리고는 살아남았습니다. 올해가 이 비극이 일어난 지 딱 80주년이 됩니다.

남북한에서 이를 기념하는 무슨 행사는 있었습니까?

임채욱 선생: 무슨 좋은 일이라고 기념을 하겠습니까만 기억은 해야 하는 우리 동포의 역사지요. 그래서 남쪽 한국에선 ‘눈물의 회상열차’란 이름으로 국제한민족재단이란 단체 주관으로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서 중앙아시아로 향한 행사를 열었습니다. 80주년을 뜻하려고 참가자를 딱 80명으로 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서 러시아의 빠리라고 하는 도시 이르쿠츠스크를 거치고 과학도시 노보시비리스크를 지나 카자크스탄 우슈토베 란 곳에 내렸습니다. 이곳은 그 때 그 동포들이 내린 첫 기착지였습니다. 이곳에서 이번에 간 일행은 진혼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위령비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카자크스탄 옛 수도였던 알마타에 있는 고려극장을 찾아서 추모예술제를 열었습니다. 또 세계 한민족 포럼도 열어 학술토론회도 가졌습니다. 코리언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는 이 비극의 이주를 되새기고 기억하면서 현재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후손들의 정체성을 내다보려는 내용이었지요.

혹시 임채욱 선생님도 참가 하셨는지요?

임채욱 선생: 아닙니다. 저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4월, 80년 전 우리동포들이 러시아 땅 연해주를 떠날 때 첫 집결지이고 시발점이라고 하는 연해주 라즈돌노예 역을 찾아갔습니다. 큰 역은 아닙니다만 이 역에서 눈물의 이주가 시작됐습니다. 여름 내내 땀 흘리면서 지어놓은 농작물도 그대로 둔 채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른 채 화물열차에 실려 갔으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아우츠비츠로 끌려간 유태인 보다 못한 처우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가는 도중 죽은 사람만 2만 명이 넘은 것이지요. 라즈돌노예 역사에서 저는 만감이 오고 가는 가운데 나라가 망하면 백성들은 이렇게 어육보다 못한, 생선이나 짐승고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북한에선 이 사건과 관계되는 행사는 없었습니까?

임채욱 선생: 알지를 못합니다. 아마도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북한 역사책이나 자료에 이 고려인강제이주와 관련된 기사는 없습니다. 소련 공산정권시절 스탈린이 명령한 이 일을 두고 북한이 언급하기는 어렵겠지요.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 시기 때 “소련군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라는 구호도 내 걸었으니 당연히 그 사건을 언급하기 어렵지요. 그건 또 흑하사변을 두고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요.

흑하사변은 무엇입니까?

임채욱 선생: 흑하는 흑룡강을 말합니다. 흑룡강을 러시아는 아무르 강이라 하지요. 이 강변도시 흑하 자유시에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1921년 6월 말, 소련 붉은 군대가 우리나라 독립군을 공격해서 수십 명, 수 백 명이 죽고 다칩니다. 이 사건을 북한에선 조선독립군 사이에 벌어진 유혈사건으로 봅니다. 물론 우리 독립군끼리 주도권 다툼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소련군이 우리 독립군을 공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우리 독립군끼리 싸웠다면서 김일성처럼 뛰어난 지도자가 없어서 그리 됐다고 설명합니다. 이 사건의 전말은 사실 복잡합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독립군끼리 주도권다툼에서 온 것은 틀림없지만 일본이 소련 땅에 조선독립군이 있는 것을 자꾸 항의하니까 일본을 의식해서 소련 적군이 우리 독립군더러 무장해제를 하라 했지요. 합니까? 당연히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 독립군을 공격해서 죽이고 다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인들을 이렇게 강제이주 시킨 이유는 뭣 이였습니까?

임채욱 선생: 그것도 다분히 일본을 의식한 조치였습니다. 그 때 소련당국은 일본이 러시아 연해주를 침공 하면 조선사람들이 일본 편에 설 것이라는 우려를 했습니다. 이를 미연에 막으려고 이런 비극적인 일을 벌인 것입니다. 지도자의 판단은 참으로 중요하지요.

지금 고려인이라고도 하고 조선사람이라고도 했는데, 해외 우리 동포들을 지칭하는 이름들도 여럿입니다.

임채욱 선생: 네. 만주나 러시아 땅에 옮겨온 우리 동포들은 조선사람이라고 했지요. 그 때 나라이름이야 조선조 말이고 대한제국 때니까 조선사람, 대한사람이라 했지요. 하지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동포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에 있는 우리동포 후손들은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돼서 조선족이 된 것이고, 일본에 살다가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은 재일조선인 또는 재일한국인이 된 것이죠. 다 연유가 있고 사연이 있는 것이니 굳이 하나로 통일 될 일도 아닐 것입니다.

이번 ‘눈물의 회상열차’ 행사가 주는 교훈이랄까 의미는 무엇일까요?

임채욱 선생: 이번에 (그 때) 강제 이주 될 때를 생생히 기억하는 95세 되신 고려인이 환영대열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 분의 증언처럼 시베리아 대륙과 중앙아시아 땅에 묻힌 고려인의 슬픈 역사를 알고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이들 후손 고련인들에게 민족정체성이나 자긍심을 안겨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이들 동포들 후손들도 한반도 통일에 도움이 될 인적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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