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과 애국문화운동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7-11-17
이메일
댓글
공유
인쇄
  • 인쇄
  • 공유
  • 댓글
  • 이메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세운 최초의 한인촌 '파차파 캠프'의 사적지 현판식이 지난 3월 23일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 시에서 진행됐다. 사진은 파차파 캠프 구성원들의 기념사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세운 최초의 한인촌 '파차파 캠프'의 사적지 현판식이 지난 3월 23일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 시에서 진행됐다. 사진은 파차파 캠프 구성원들의 기념사진.
사진-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통일문화산책 오늘은 애국 계몽운동, 애국 문화운동, 즉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는 남북한의 관점이 차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임채욱 선생: 오늘날 남북분단에 영향을 준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한 일을 두고 한국에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북한에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이지요. 서로 같은 시각일 수도 있고 다른 시각일수도 있지요. 관점의 차이가 있다면 그게 통일문화를 형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줄까 하는 것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애국계몽운동과 애국문화운동은 유사한 운동 같기도 한데 같은 내용인가요?

임채욱 선생: 맞습니다. 같은 내용입니다. 표현상 남쪽에서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말하고 북쪽에선 애국문화운동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상 차이는 있어도 내용은 같다는 것이군요. 그럼 두 운동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요.

임채욱 선생: 먼저 이 운동이 있었던 시기를 말씀 드리죠. 여러분, 1905년에 우리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때는 우리나라가 대한제국이란 이름으로 고종이 황제라고 칭하던 시기입니다. 이보다 앞서 1895년에 못된 일본 놈들이 우리 고종의 왕비인 민비를 시해한 사건이 있었죠? 이에 겁을 먹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을 하지요. 한 나라의 왕이 남의 나라 공사관에 피신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어쩝니까? 나라 힘이 없으니 그리 되는 것 아닙니까? 고종은 무려 1년이나 러시아 공사관에 있다가 우리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그게 1897년 2월입니다. 이 때 그 때까지 서로 다투던 개화파와 수구파가 힘을 합쳐서 우리가 청나라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도 황제의 나라가 돼야겠다고 나라이름도 제국으로 바꾸고 왕도 황제로 부르기로 결정합니다. 이래서 성립된 나라가 대한제국이고 이때가 1897년 10월입니다. 대한제국을 세우기까지는 개화파나 수구파가 협조가 됐는데 정작 나라를 제국으로 만든 뒤 의견이 갈라집니다. 개화파는 민권을 늘리고 황제권한을 줄이는 방향으로 입헌군주제를 만들자고 하고 수구파는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면서 전제군주제를 하자고 주장합니다. 입헌군주제를 하게 되면 오늘날 국회와 같은 기구가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진행됩니까?

임채욱 선생: 개화파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운동을 펴는데 수구파가 생각하기를 그렇게 되면 자기들은 정권에서 쫓겨나게 된다고 보고 고종에게 거짓으로 개화파가 고종을 물러나게 하는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보고를 합니다. 이에 자기를 물러나게 하는데 가만히 있을 고종이 아니었죠. 개화파를 모두 잡아들이고 수구파를 중심으로 한 전제군주 정부를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개화파의 뜻은 사라지고 1905년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이긴 일본은 노골적으로 우리 대한제국에 치안권을 내놓아라, 보호조약을 체결하자, 하다가 1910년 8월 드디어 외교권도 빼앗아 버리지요. 이게 우리나라가 일본에 식민지가 되는 과정이었지요. 그러니까 일본이 러시아에게 전쟁에서 이긴 1905년부터 나라가 완전히 빼앗긴 1910년 사이에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가만있었겠습니까? 개화파 지식인들은 개화를 하고 나라를 스스로 강하게 하자는 자강운동을 벌였지요. 개화파뿐 아니라 수구파 지식인 중에서도 들고 나섰지요. 이런 운동을 두고 한국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이라 하고 북한에서는 애국문화운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 이제 두 표현의 개념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내용도 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

임채욱 선생: 네. 뭐라고 할까요. 대동소이라고 할까, 전반적으로 같은데 세부적인 부분은 다르다고 할지, 남쪽에선 이 운동이 어디까지나 진보적인 지식인 위주로 추진됐다고 한다면 북쪽에선 지식인들이 인민들의 반일투쟁에 고무돼서 나섰다고 말하지요.

그럼 남북한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시죠.

임채욱 선생: 애국계몽운동이나 애국문화운동은 다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빼앗기고 나서, 나라가 힘이 없고 개개인이 실력이 모자라서 이렇게 됐으니 이제부터는 힘을 기르고 실력을 양성하자는 자각이 일어났지요. 그래서 애국계몽운동이나 애국문화운동은 일반적인 계몽운동이나 문화운동이 아니라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계몽운동이나 문화운동은 1905년 이전에도 있었고 1910년 이후에도 있었지요. 이런 운동은 목표가 국권회복입니다. 빼앗기고 있고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 데는 이런 계몽운동이나 문화운동만 한다고 됩니까? 직접 총을 들고 일제강도와 싸우는 의병활동도 국권회복운동이지요. 그러니까 국권회복운동이란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보탬이 되는 계몽운동과 문화활동을 한 것을 말하지요.

어떤 형태로 진행됐는지요?

임채욱 선생: 크게는 교육을 통해 실력을 기르자는 신교육운동, 언론을 통해 계몽을 하자는 언론운동, 민족산업을 장려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산업진흥운동, 신문화 내지 신문학을 내세우는 신문화운동, 우리 역사를 다시 고쳐 읽고 쓰자는 국학운동, 민족종교를 찾자는 민족종교운동 등으로 전개했지요. 하나하나는 설명이 길어집니다만 이 모든 운동은 자체적인 의미도 있지만 어떤 경우 국권회복을 무력 활동 형태로 전개하는데 도움 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의 주체는 지식인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단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요?

임채욱 선생: 앞에서 지식인이라고 말했는데 지식인 중에서도 개화를 꿈꿨던 사람들, 우리 스스로 힘을 길러야겠다는 자강파 지식인들이 단체를 통해서도 하고 애국적인 지식인들이 개별적으로도 하고 했지요. 대표적으로 독립협회가 있고 신민회가 있고 대한자강회, 서우학회, 기호흥학회, 관동학회, 교남교우회 등 아주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독립협회는 잘 알 것을 보고 신민회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907년 안창호가 발기해서 만든 신민회란 단체는 비밀단체로 운영됐는데 회원이 800명입니다. 800명 지식인이 움직였다는 것이지요.

활동형태는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요?

임채욱 선생: 신교육 운동은 무엇보다 학교를 많이 설립하려 했지요. 사립학교설립운동을 벌여서 1907년에서 1909년 4월 사이에 우리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학교가 3000여개 됐다니 얼마나 대단한 열의입니까. 언론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등을 창간해서 민중들의 계몽에 앞장섰지요. 일제는 신문을 검열하고 탄압했지만 이를 무릅쓰고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을 목표로 언론활동을 전개했지요.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의병운동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지요. 산업진흥운동은 민족산업을 키우기 위한 운동으로 우선 나라 빚을 갚자는 운동도 벌이고 담배를 끊자는 운동형태로 전개됐습니다.

다음 신문화 운동은 독립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소설과 노래를 만들고 보급시키는 운동을 벌였고 국학운동은 우리글을 알고 우리 역사를 옳게 알자는 운동형태로, 주시경은 국어운동을 했고 신채호는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노력을 기우렸습니다. 다 빛나는 애국 활동 이였지요. 또 민족종교운동도 일어났는데 단군을 국조로 하는 신흥종교를 이끈 나철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지요. 이 정도로 하고 자세한 것은 다음 기회에 또 말씀 드리지요.

애국계몽운동이나 애국문화운동이 성공을 했다면 그 때 이미 독립이라는 좋은 결실이 있었을 텐데, 그런 것은 없었던 아닙니까. 이 운동의 의의라고 할까, 결과를 말해주시지요.

임채욱 선생: 이 운동이 당장 독립운동을 펼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무력항쟁을 하는 의병이나 독립군을 결과적으로 도와서 국권회복에 보탬이 되려 한 것이니까 그 목적은 이뤄낸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운동을 통한 자각과 실력이 있었기에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한국에서 말하는 애국계몽운동과 북한에서 말하는 애국문화운동에서 결정적으로 차이 나는 부분은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사실에 관한 서술에는 차이가 없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평가에서는 한국에서 보다는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를 합니다. 이 운동이 부르죠아 민족주의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한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봉건주의 사상을 바꾸는 것도 못했고 일제에게 무력으로 덤벼드는 무력투쟁에 합류를 못한 운동으로 평가한다는 것 외에는 전반적으로는 같습니다. 이런 견해차이 정도라면 앞으로 통일문화를 형성 하는 데서는 아주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하고 싶은 말 (0)
  • 인쇄
  • 공유
  • 이메일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