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환의 한국전쟁 이야기] ① 한국이 북침?

서울-고영환, 박성우 xallsl@rfa.org
201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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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다리’ 근처에 있는 녹슨 증기 기관차. 이 기관차는 한국전쟁 중 피폭, 탈선된 다음 반세기 넘게 비무장 지대에 방치되어 있었던 남북 분단의 상징물이다.
RFA PHOTO-박성우
MC: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올해로 60년이 됐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북한 외교관 출신인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과 함께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 당국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를 점검해 봤습니다.

'고영환의 한국전쟁 이야기' 오늘은 그 첫 번째 편으로 한국전쟁은 과연 북침이었는지를 살펴봅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에 있는 임진각. 군사분계선에서 7km 남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상공에는 군용 헬기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이동하며 군사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상에는 북한과의 접경지역이 어떤 곳인지를 보고 느끼기 위해 온 관광객들로 붐빕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물론이고 중국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도 눈에 띕니다.

이들은 1953년에 만들어진 ‘자유의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모습입니다. 건설 당시 길이가 83m였던 이 다리는 휴전협정 이후 한국군 포로 1만3천여명이 자유를 찾아 귀환했다고 해서 ‘자유의 다리’로 불립니다.

박성우 기자와 함께 취재에 나선 고영환 연구위원은 군용 헬기가 날아다니는데도 민간인들이 사진을 찍으며 자유롭게 관광하는 모습이 “이채롭다”고 말합니다.

기자: 위원님, 북한에서는 보통 ‘전연’이라고 하죠. 한국에서는 전방, 최전방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지금 ‘자유의 다리’ 위를 걷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이렇게 많이 와 있는데, 전연이라는 느낌이 드십니까?

고영환: 전연이라는 느낌보다는 관광지라는 느낌을 받는데요.

기자: 요즘은 안보 관광지라고 부르더라고요. 조금 더 걸어 보시죠.

‘자유의 다리’를 등지고 왼편으로 돌아서면 녹슨 증기 기관차가 보입니다. 이 기관차는 한국전쟁 중 피폭, 탈선된 다음 반세기 넘게 비무장 지대에 방치되어 있었던 남북 분단의 상징물입니다. 이 기관차에는 1,020여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기자: 아주 녹이 쓴 열차의 기관차 한 량이 서 있습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 기관차’라는 안내 표지판도 있는데요. 자세히 보니까 녹슨 기관차에 총탄 구멍도 보이고요. 설명을 안 해도, 이 기차는 전쟁 당시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남겨진 열차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걸 보시니까 당시 전쟁의 분위기가 좀 느껴 지시는지요?

고영환: 그렇죠. 기관총 맞은 자리, 포탄 맞은 자리,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고요. 이 기차만 보더라도 6.25때 얼마나 참혹했는지, 그 느낌이 들고요. 참 가슴 아픈 현장이네요.

이곳 임진각이 위치한 문산은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남침을 위해 선택한 주요 공격로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한국전쟁은 남측에 의한 북침으로 시작됐다고 믿고 있습니다. 고영환 위원도 북한에 있을 땐 “당연히 북침인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기자: 위원님께서도 북한에 계실 때, 한국전쟁은 ‘북침’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고영환: 저는 뭐 의심할 여지없이 북침이라고 확신했어요. 신천 박물관이나 조국해방전쟁 기념관에 가면 덜레스가 북쪽을 가르치는 사진이 있어요. ‘북침 공격 명령을 내리는 덜레스 (미 국무부 장관의) 고문’이라고 설명하죠. 또 당시 남한의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아침은 해주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게 ‘철저하게 준비된 북침이었다’라고 생각했었죠.

기자: 그러면 한국전쟁은 남침이라는 건 언제, 어떤 경로로 알게 되셨습니까?

고영환: 제가 처음으로 (북한의) 해외 대사관에 나간 게 1980년 7월인데요. 그 때 유럽의 텔레비전들이 ‘불길에 휩싸인 세계’라면서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한 다큐멘터리, 그러니까 기록영화들을 방영했는데요. 제가 그런 기록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밤에 이걸 보면, 거기에 한국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는 장면, 모택동을 만나는 장면, ‘공격 명령서’ 같은 자료들이 삽입돼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런 자료들을 많이 찾아봤어요. 그러면서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기본적으로 싸움을 잘 하는 사람들이 북조선 사람들이 아니고, 중국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주력이 돼서 (북조선으로) 들어왔구나, 이런 걸 알게 됐죠. 그리고 공격을 당한 측이 어떻게 반격해서 3일만에 남의 수도를 점령했나, 이것도 의심스러웠죠. 그러니까 자료를 들춰보면 볼 수록 ‘이게 북한이 일으킨 남침이 맞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구(舊)소련의 문서고에서 나온 자료들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9년 3월과 1950년 3월 스탈린을 찾아가 전쟁을 위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합니다.

스탈린은 ‘중국의 지도자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전쟁을 추진하라’는 조건을 붙여 김일성의 요구에 응합니다. 이로 인해 김일성은 1950년 5월 중순 북경을 찾아 모택동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해 승락을 받아냅니다.

남침을 위한 작전 계획은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과 바실리에프 소련 군사고문단장이 중심이 돼 1950년 5월29일 완성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한국전쟁은 북침’이었다고 교육합니다. 그 첫 번째 근거로 북한 당국은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의 고문이었던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3.8선을 방문한 사진을 제시한다고 고영환 연구위원은 말합니다.

기자: 위원님, 하나씩 여쭤보겠습니다. 1950년 6월18일, 미 국무장관의 고문이었던 덜레스가 3.8선을 방문했습니다. 이걸 북침의 근거라고 설명하는 북측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고영환: 미군이 남한에 들어와 있었고, 북한에는 소련 군대가 있었는데요. 당시 에치슨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방어선을 알류산 열도, 오키나와, 필리핀 쪽으로 후퇴했어요. 그러면서 한국에 있던 미군을 몽땅 뽑아버렸어요. 미군의 철수로 공백 상태가 되니까, 한국 측에서 굉장히 불안해 했어요. 그러니까 원래 일본만 방문하게 돼 있던 덜레스 고문을, 북한 사람들도 다 아는 무초 (주한 미국) 대사가 간청해서, ‘한국 사람들이 너무 불안해 하니, 여기를 좀 들려달라’고 해서 덜레스 고문이 한국에 온 겁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나서 ‘지금은 소련이 남침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안심하라, 우리가 항상 뒤에 있다’면서 안심을 시키러 온 것이지, 북침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온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진이 묘하게 (덜레스가) 북녘 땅을 가르키면서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찍혔고, 북한 사람들은 또 그렇게 선전을 한 것이고, 그러니까 북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거지요.

자유아시아방송이 미 국무부 문서고에서 찾은 자료들에 의하면, 덜레스 고문의 한국 방문이 이뤄진 건 무초 (John Muccio)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적극적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무초 대사가 1950년 6월1일 러스크 (Dean Rusk)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에게 보낸 서한에는 ‘미국의 고위급 관료들이 일본은 들르면서 비행기로 4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 한국은 찾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초 대사는 “미국 관료들이 일본만 들르는 행동은 오랜 우방인 한국보다 최근까지도 적국이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미국이 유지 발전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한국 사람들이 갖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미국 정부의 고위급 관료들, 특히 국무부와 국방부의 관료들이 한국을 주기적으로 찾는다면, 이는 한국 사람들의 사기를 고양하게 될 것(their morale would be greatly heartened)”이라고 무초 대사는 당시 서한에서 설명했습니다.

이 같은 배경 하에서 덜레스 고문은 일본 방문을 마친 후 서울을 찾아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고 국회에서 연설합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고문의 6월19일 면담에 동석했던 앨리슨 (John Allison) 미 국무부 북동아시아 담당 국장이 남긴 보고서에는 공산권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확고한 약속 (definite commitment of continuing American aid)’을 해 주길 이승만 대통령이 희망했다고 적혀있습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고 무력으로 도발할 가능성을 이 대통령은 우려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또 ‘자신이 미국으로부터 바라는 긍정적 행동이 꼭 군사력에 의한 행동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면서, 하지만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 냉전에서 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the President did state that his desire for positive action did not necessarily mean action by armed forces but he was insistent that unless something was done the cold war would be lost)고 앨리슨 국장은 기록했습니다.

이에 대해 덜레스 고문은 ‘소비엣 러시아는 현재로서는 실전에 개입하길 희망하지 않고 있다는 게 미국 정부의 의견’(It was the opinion of the best informed minds in the U.S. government that Soviet Russia did not for the present wish to become involved in a shooting war…)이라고 설명하고,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에게 핵이 사용될 잠재성을 갖고 있는 제3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No country could guarantee another country against the results of a third world war with its potentialities of atomic warfare…)고 말한 걸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에 이어 덜레스 고문은 국회에서 연설을 통해 ‘한국은 혼자가 아니며, 한국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설계에 충실히 참가한다면 한국은 앞으로도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다’(You are not alone. You will never be alone so long as you continue to play worthily your part in the great design of human freedom)라고 말합니다.

이같은 역사적 기록을 놓고 볼 때, 덜레스 고문이 한국을 찾은 건 북한의 주장대로 공격 명령을 내리기 위한 게 아니라, 남침을 우려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국민들에게 전쟁 발발의 위험이 당시로서는 낮다는 걸 설명해 주고, 미국은 항상 한국을 지원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방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 발발 이전에 남측의 정부 당국자들이 마치 북한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양 내뱉은 발언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기자: 위원님도 잠시 말씀하셨지만, ‘아침은 해주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건 당시 남측의 고위급 군 당국자가 분명히 했던 말입니다. 이걸 액면 그대로 보자면 남측이 북측을 군사적으로 치겠다는 말인데요. 이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고영환: 먼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관계를 제가 잠깐 설명할게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고, 김일성은 1939년 후반, 1940년 전반기에 하바롭스크 근처의 브야츠크에 있는 ‘붉은 군대’의 병영에서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에 소속된 ‘붉은 군대’의 대위 군복을 입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김일성은 당연히 미국에 대해서 반감을 갖도록 교육을 받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자연히 공산주의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던 거죠. 이건 서로 비슷한 거예요.

남측과 북측의 지도부는 이념적 차이로 인해 서로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북측의 김일성 정권을 불법 집단으로 간주했고, 이 같은 입장은 ‘북벌론’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실제로 내놓은 방안은 선거를 통한 민주적인 통일이었습니다. 1948년 5월31일 제헌국회가 소집되었을 때, 이승만 정부는 남한의 국회의원수 200석과 북한의 국회의원수 100석을 배분하고, 북측의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뒀습니다. 북한이 언제라도 유엔의 감시하에 자유 총선거를 통해 10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면 한국 국회에 참가시켜 대한민국의 관할권을 북한까지 연장하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남측 국방부의 고위급 인사들은 왜 북벌론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제기했을까.

김행복 박사가 2002년에 쓴 <6.25전쟁과 채병덕 장군>이라는 책에는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라는 당시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의 발언이 왜 나오게 됐는지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북한의 남침설이 분분하던 때였으므로, 국군이 결코 허약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여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런 자신감을 피력하는 데 당시의 군 수뇌부의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어 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군 내부에서는 북벌론을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공개적으로는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한 셈인데, 이는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뜻을 받들고 국방부 장관의 의중을 감안하는 면이 있지 않았을까. 또한 군 수뇌부가 자기 군대를 약하다고 할 수 없어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 아닐까.”

고영환 위원도 이 같은 설명에 동의합니다.

고영환: 이승만 대통령은 그냥 말로만 ‘북진 통일을 해야 된다’고 말했고, ‘통일을 해야 된다’고 말했지요.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니까) 당연히 그 밑에 있던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이나 신성모 국방장관은, 솔찍히 말하면 대통령의 눈에 좀 들어야 하니까 ‘아침은 해주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거지요. 그런데 이게 독으로 작용했어요. 미국 사람들이 깜짝 놀란 거지요. ‘한국에 공격용 무기를 주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해서 공격용 무기를 남측에 하나도 안 줬어요. 그런데 북한은 스탈린으로부터 탱크 250대와 장갑차 등을 제공받았죠. 모택동도 중국 내전에서 단련된 조선족 출신 의용군을 북한에 보내줬습니다. 이렇게 남과 북이 차이가 많았던 거죠.

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은 소련에서 지원받은 T-34형 탱크 242대를 포함해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대규모의 병력을 지원받습니다. 한국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5년에 발간한 <6.25 전쟁사>에 따르면, 중국은 1949년부터 1950년 6월까지 3개 사단과 2개 연대 병력 최소 5만명 이상의 한인 사병을 북한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북한군에 이첩된 한인 병력의 대부분은 중공군에 소속돼 국민당과의 내전을 치른 경험이 있었고, 이들의 규모는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 10개 사단 총 18만여 명의 병력 중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고 <6.25 전쟁사>는 기술합니다.

하지만 1950년 6월 당시 한국군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 수준이었습니다. 대전차 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소련제 T-34 탱크를 격파할 수 없는 무기들이었습니다.

북한군은 이처럼 압도적인 무력의 우위를 앞세우고 1950년 6월25일 새벽 남침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기자: 한국전쟁이 남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권은 이걸 북침이라고 주민들에게 교육을 시킨 건데요. 이렇게 교육함으로써 (북한 정권이) 얻을 수 있는 건 뭐라고 이해하면 됩니까?

고영환: 북한은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자기가 먼저 남들 다 자는 새벽에 공격했다고 그러면 주민들도 좋아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일단 우리는 피해를 당한 사람으로서 반격했다. 그런데 김일성 최고 사령관의 영군술이 있어서 낙동강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거죠. 결국은 김일성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면서 북한이 정의로운 전쟁을 했다는 걸 이해시키고, 그런 논리를 세우기 위해 계속해서 이것이 북침이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미국과 남한에 대한 적개심 고취’ 그리고 ‘주체사상과 선군사상’ 이 두 가지로 북한 사람들을 교육합니다. 이게 북한 체제를 유지하는 동력이거든요. 그런데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의 주장이) 만약 사실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래서 동력이 하나 무너지면, 집이 무너질 것 아닙니까. 그러면 체제가 무너질까봐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지요.

북한 당국은 ‘남측이 전쟁을 일으켰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고 여전히 주민들에게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청소년들도 미국을 이른바 ‘철천지 원쑤’로 인식합니다. 북한의 이 같은 현실이 임진각을 찾은 고영환 연구위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지금까지 취재에 박성우 기자와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 진행에 이예진, 제작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서울지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