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선목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원
2015.08.24
speaker_dmz-305.jpg 군 당국이 북한군의 비무장지대(DMZ)에 의도적으로 목함지뢰를 매설한 행위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경기도 파주 인근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일부 시행했다고 10일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친애하는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남북관계는 여러분들도 다 경험하고 계시겠지만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난 8월 4일 군사분계선 남쪽지역에서 발생한 목함지뢰 폭발이 발단이 됐는데요, 남한군인들이 다니는 순찰로 문 바로 옆에서 3발이 폭발해 군인 2명의 발이 절단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남한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2004년 중단했던 대북확성기 방송을 재개했습니다.

이에 발끈한 북한은 10일 뒤 고사총 1발, 76.2mm 평사포 3발을 남쪽지역에 발사했죠. 박근혜대통령이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전승 70주년 행사에 참가하겠다고 발표한 날에 말입니다. 남한은 155mm 자주포 29발을 북쪽에 응사했고요.

이어 북한은 48시간 내에 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격파사격, 조준사격을 하겠다고 최후 통첩하는 한편 김양건은 대화의 문도 열려있다는 통지를 청와대에 보내기에 이릅니다. 다 보셨겠지만 김정은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의도 열었죠.

그리고 48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북한은 남쪽에 대화를 제기했습니다. 김양건 통전비서는 남한의 통일부장관과 격이 맞지 않는다고 이전에는 튕기었는데 이번에는 본인들이 직접 요청해 만나 밤샘 고위급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방송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남한을 대한민국이라고 호칭하기도 했습니다. ‘남조선 괴뢰’, ‘미국의 식민지’라고 하던 것을 싹 ‘잊고’요. 비록 다음날에 ‘괴뢰’라는 말이 다시 등장했지만 말이죠.

나이가 김양건 비서는 78세의 고령이고, 황병서 총정치국장도 67세로 적지 않은 데 아마도 김정은이 무조건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대북방송을 끄고 돌아오라고 지시를 내렸는지 이틀 밤을 꼬박 새면서 떠나지도 못하고 회담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서는 전례 없던 일이죠. 물론 남북회담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보다 더 긴 사례도 있었습니다. 합의서 문안의 단어 하나 때문에 몇 시간씩 허비했고, 서명하는 이름의 성을 ‘리’씨로 할지 ‘이’씨로 할지에 대해서도 오랜 시간 씨름했다 네요.

북한의 어떤 간부는 비공개접촉 때 ‘솔직히 우리가 힘들다. 살려 달라’라는 말도 했고, 2009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싱가포르에서 접촉할 때는 ‘(경제지원 약속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가면 죽는다’라고 속사정을 토로한 적도 있답니다.

합의한 문안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었는데요, ‘남북은 최근 불미스러운 군사적 충돌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상호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공동 노력하기로 했다’에 대해선 남측은 ‘북한이 사과했다’, 북측은 ‘남조선이 조작한 걸 시인했다’는 식으로 제각각 구미에 맞게 해석했다죠.

북한에는 딱할 때 쓰는 유머가 하나 있습니다. ‘야 요건 버선목이라고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아마도 현재 연로한 몸에 며칠 동안 회담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북한 고위간부들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지르기는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다 저질러 놓고 뒤 수습은 자기들이 해야 하니.

아무쪼록 이번 일이 잘 풀렸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대동강 이야기’의 김광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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