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에 가장 용감했던 평양사람들

주성하∙ 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4.02.28
cityhall_31memorial-305.jpg 제95주년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서울시청 유리 외벽에 대형 태극기가 붙여져 눈길을 끌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3.1절입니다. 여기 남쪽은 이날이 공휴일인데, 올해는 원래 토요일이 쉬는 날이니 아쉽지요. 한국은 올해부터 대체휴일제도라는 것을 도입해 설날, 추석, 어린이날에 한해서 그 명절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있으면 대신 평일에 하루 더 쉬게 합니다. 아쉽게도 3.1절은 대상이 아닙니다. 각종 명절을 다 휴식을 주면 한국의 생산력이 크게 떨어지겠죠. 그렇지 않아도 대기업이나 관공서를 포함해 많은 직장인들이 일주일에 토·일요일 이틀을 쉽니다.

어느 경제단체가 계산해보니 공휴일과 토·일요일, 연차휴가를 포함한 한국의 연간 휴식일은 135일~145일에 이른다고 합니다. 북한이야 하는 일도 없이 토요일까지 사람 불러내서 일 시키고, 학습시키고, 때로는 일요일까지 불러내니 남쪽 근로자들이 주 5일만 일하고 이틀은 집에서 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꿈만 같은 사회라고 부러워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닷새 동안은 북한에 비할 바 없이 열심히 일합니다. 한국의 노동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 즉 OECD 가입국 중에선 제일 많답니다. 물론 OECD가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나라 34개를 모아놓은 것이긴 하지만, 아직은 한국이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에 비해서야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오늘 하루는 북한에서 휴식도 주고 중앙기념보고대회도 하겠죠. 1919년에 벌어진 3.1만세운동은 일제 치하 최대의 항일 민족 항쟁운동이었습니다. 한반도는 물론 미주, 하와이, 일본 등지에서 나라 잃고 유랑하던 모든 한민족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모든 종교인도 단합하였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 같이 항쟁하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외쳤습니다. 3.1운동의 불길은 그렇게 1년 넘게 전국을 달구었습니다.

북한에서 3.1절 교육을 들으면 평양에서 벌어진 3월 1일 시위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지도하에 일어났다고 선전합니다. 또 7살밖에 안 되는 어린 김일성도 이 시위에 나가 조선독립 만세를 목청껏 부르며 어른들과 시위했다고 배웁니다. 북한의 모든 역사 교육이 김일성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7살짜리가 시위대 앞장에 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내용인데, 아무튼 그렇게 뻔한 거짓말을 늘여놓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몰라도, 김형직이 3.1만세 운동에 나섰던 것은 여러 정황상 맞을 것 같습니다.

당시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7개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시위가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은 평양입니다. 평양 시위 시간이 1시였는데, 서울에선 2시 반쯤에 시작됐습니다. 평양의 시위는 현재 만수대학생소년궁전 자리에 있던 장대현 교회와 그 앞에 있던 숭덕학교 등 3곳에 종교인들이 모여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시작됐습니다. 그 시기 김형직은 장대현 교회와 숭덕학교 일에 관여하고 있었으니 아마 평양 사람들이 다 나선 시위에 동참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평양의 3.1만세 시위는 또 전국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

여기 한국은 3.1운동 하면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유관순 열사로 꼽습니다. 18살 어린 나이에 시위에 나섰다가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일제에게 체포되지만, 끝내 지조를 지키다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3.1운동의 상징입니다. 다만 유관순 열사는 3.1만세 운동이 벌어진지 한 달이 지난 4월 1일에 시위에 나섭니다. 여기 남쪽에선 3.1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시위 지역을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장터로 꼽는데 바로 이곳이 유관순 열사가 시위에 나섰던 곳입니다. 아마 남쪽에서 아우내장터를 3.1만세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고장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이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며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헌데 그거 아십니까. 3월 1일 당일에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진 곳은 모두 7곳인데,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그리고 서울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서울 한 곳만을 빼고는 모두 북한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벌어졌던 최대의 항일 민족 항쟁에서 북한 사람들이 제일 앞장에 섰던 것입니다. 그랬던 북한이 지금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 용감했던 사람들이 노예가 돼 버렸으니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1946년 3월 1일 평양 기념행사장에서 한 청년이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집니다. 그걸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막아서 김일성이 삽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평양 사람들에겐 용감함이 살아 있었습니다. 노비첸코가 군인이니 목숨 걸고 자기 임무를 수행한 것에 대해선 뭐라 하지 않겠지만, 만약 그때 그가 수류탄을 막지 않았다면 북한 역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1919년 일제에 항거해 가장 앞장서 싸웠던 북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장 용감했던 것이 평양사람이었다는 것은 지금 와서 보면 자랑스럽기보단 어쩌면 정말 슬픈 일입니다. 만수대에 올라가 김일성, 김정일 동상에 머리 숙일 때 95년 전에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흰옷을 입은 수천, 수만의 평양사람들이 바로 만수대언덕을 하얗게 덮으며 일제의 총칼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그 장엄하고 비장했던 모습을 말입니다.

이제 그런 일을 다시 볼 순 없을까요. 만수대에 까맣게 모여 북한을 세계에서 제일 거지국가로 만들어버린 두 우상을 향해 엉엉 울지 말고, 자유와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며 쏟아져 내려올 순 없을까요. 2019년이면 3.1운동 100주년입니다. 그 전에 우리 민족의 얼과 기상이 죽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목숨 걸고 세상에 보여주는 날이 왔으면 하는 희망을 걸어보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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