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를 통해 비춰보는 북한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5.12.11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많은 나라들이 지폐에 자기 나라를 상징하는 인물의 초상을 넣습니다. 여러분들이 제일 선호하는 100달러 지폐에 들어가 있는 미국 할아버지는 벤자민 프랭클린입니다. 대통령을 지낸 적은 없지만 미국 독립선언서를 쓰는데 관여해 미국 정신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일본 근대화 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창립자이며 산케이신문 전신인 시사신보 창업주인 후쿠자와 유키치. 가와무라 기요오(川村淸雄)가 그린 그의 만년시대 초상.
일본 근대화 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창립자이며 산케이신문 전신인 시사신보 창업주인 후쿠자와 유키치. 가와무라 기요오(川村淸雄)가 그린 그의 만년시대 초상.
사진-연합뉴스 제공

중국은 아시다시피 모택동 초상화입니다. 한국은 1만 원짜리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종대왕 초상화가 들어갔습니다만, 최근 최고액권으로 50달러 정도 가치를 가진 5만 원짜리가 나오면서 신사임당 초상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신사임당이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게 맞냐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럼 1만 엔 지폐에 들어간 얼굴은 누구일까요. 저도 얼마 전에 알았으니 여러분들은 모를 겁니다. 그래서 달러는 ‘아바이 한 장’이라고 하면서 엔화는 일본 아바이라고 하지 않고 꿩 대가리 한 장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 1만 엔에 들어간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라고 일본 명치유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정치가라기보다는 1800년대 중반 근대 일본을 이끈 인물들을 키워낸 교육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1800년대 일본의 유명 교육자가 후쿠자와 유키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일본에선 존경하는 사람 꼽으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갑니다. 2004년에 일본이 화폐 속 초상을 다 바꾸면서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얼굴은 바꾸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일본의 상징적 인물이란 뜻이겠죠.

오늘날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립니다. 일본에선 위인이지만 한국에선 그를 칭송하면 친일 매국노쯤 취급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살던 시기 일본은 미국 군함이 와서 포를 몇 방 쏘니 괴물이 왔다고 모두 도망가던 허약한 나라였습니다. 이 시대를 산 후쿠자와는 서방을 배우려고 미국을 두 번, 유럽을 한번 방문하는데, 이를 통해 당대 제국주의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그는 철저히 서방을 배우자고 외치고 후대를 양성하는데, 그의 사상이 퍼지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국가로 변신했고, 1900년대 초반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는 제국주의 강대국이 됐으며, 오늘날까지 일본은 세계 경제대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육자로써도 뛰어나서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많은 단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자유, 권리 이런 단어는 영어에만 존재하고 아시아엔 그런 단어 자체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시아에 자유란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 바로 유키치였습니다. 이외 사회 문명개화 경쟁 저작권 토론 연설 자동차 등 오늘날 우리가 쓰는 없어서는 안 될 단어의 상당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사상이 높이 평가받을 부분도 있습니다.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 여성해방론자 이런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업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개화파의 수장이던 김옥균의 스승이기도 한데, 빨리 조선도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근대 사회를 만들라면서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한 것은 많은데, 비판받는 점은 제국주의의 핵심을 꿰뚫어 본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걸 응용해서 일본이 제국주의화가 되도록 부추겼다는 것이죠. 일본이 먼저 근대국가를 만들고 미개한 아시아 국가들을 점령해 서방에 맞서자고 주장한 대동아공영권이 바로 후쿠자와의 사상에서 출발합니다. 즉 일본을 근대화 시키는 사상적 업적은 쌓았지만, 한편으로 이웃 국가를 침략해야 하는 당위성을 만든 것입니다.

저는 후쿠자와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가 산 시대가 제국주의 시대인 점을 감안해 본다면 개인적으론 대단한 선구자였다고 봅니다.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에 저런 인물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조선에 저런 시대를 꿰뚫는 인재가 있었다면 반대로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쿠자와 시대에 우리는 그럼 공부를 하지 않았냐 하면 우리나라엔 일본보다 훨씬 더 많은 서당과 야학에서 더 많은 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서방을 따라잡겠다고 공부할 때 우리는 공자왈, 맹자왈을 외웠습니다. 이게 차이였습니다. 그 대가로 우리는 36년의 식민지 통치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근대화에는 실패해도, 산업화는 전 세계가 경탄할 정도로 누구보다 빨리 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에서 지식기반 시대로 넘어가는 21세기에 와서 남쪽은 한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새 시대를 잘 이끄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 제가 볼 땐 그런 사명을 감당할만한 지도자가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엔 있냐 하면, 없습니다. 근대화 시대에 인재를 키운 교육자들을 따라 배워 미래 일본을 이끌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수십 년 전에 1년에 딱 10명만 뽑아 키우는 정치학교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배출된 인재들도 일본을 경제 파탄에서 건져내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근대화에도 실패했고, 현대 산업화에도 실패해 완전히 가난한 국가가 됐습니다만, 21세기에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빨리 지식기반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업이 다 파괴돼 전부 다시 건설해야 하는 것은 때론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이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6.25전쟁 때 국토가 다 파괴되고, 신분제나 농경제도의 뿌리 깊은 잔재들도 함께 뽑혔던 것의 영향도 큽니다.

문제는 지도자의 역량과 시대를 꿰뚫어보는 능력입니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북한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습니다. 김정은이라고 못하란 법은 없지만, 외국을 이기려면 꽁꽁 닫힌 문부터 열어 개방해야겠죠. 그게 가능하지 않다면 북한 역시 미래 없는 후진국으로 계속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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