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차 북만원정의 진실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7.04.07
ilsong_partisan_b 사진은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시절 절친한 동료들과 찍은 사진으로, 가운데는 김일성, 그의 왼쪽은 안길 전 보안간부훈련대대부(1946년 당시 군 간부양성소) 참모장, 오른쪽은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이다. 최현은 최룡해 노동당 비서의 부친이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일성회고록이 말해주지 않는 김일성 항일운동의 진실. 오늘은 아홉 번째 시간으로 ‘제1차 북만원정’의 진실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1934년 10월에 있었던 제1차 북만원정에 대해 “북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보중이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 요청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북만 유격대의 역량이 부족해 김일성에게 도움을 청해 떠난 원정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왕청, 훈춘, 연길에서 선발된 3개 중대의 역량으로 구성된 170여 명의 북만원정대는 뒤틀라즈를 출발해 노야령을 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김일성은 민생단으로 두 번이나 몰렸고, 마지막엔 결국 총살될 위기에 처하자 북만으로 도주한 것입니다. 데리고 함께 도주한 부대도 한흥권의 4중대 10여 명뿐이었습니다. 1930년대 초반 동만에서 퍼진 민생단 투쟁에 대해선 여러분들도 많이 배웠습니다. 그때 정말 많은 아까운 조선 혁명가들이 대거 밀정으로 몰려 죽었습니다. 물론 당시 김일성보다 훌륭했던 많은 상관들이 처형되지 않았다면 김일성이 북한에 돌아가 지도자 감투를 쓰기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민생단 투쟁은 일제의 간교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은 중국을 의식해 중요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민생단을 잡던 간부들은 한족이 대다수였습니다. 사실 동만의 유격 운동은 조선인들이 불을 지폈고, 쟁쟁한 간부들도 조선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면서, 한족들이 텃세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별 것도 아닌 일로 조선인 간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고문해 온갖 혐의를 만들어 죽였고 그 자리에 한족을 앉혔습니다. 가령 2군 군장이던 왕덕태는 돼지나 몰던 무식한 사람인데, 위에 있던 조선인 간부들이 차례로 처형되면서 어울리지 않은 군장 감투까지 쓴 것입니다. 아무튼 한족은 조선인을 동지로 여기지 않았고, 숱한 조선인 간부를 죽인 한족 공산당 인물들은 지금도 중국에선 항일열사로 추앙받는 게 현실입니다.

80여 년전에도 그랬던 중국이 지금도 남과 북 모두를 향해 여전히 대국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죠. 아무튼 중국은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할 국가입니다.

어쨌든 당시 동만에 불었던 민생단 바람의 와중에 김일성은 처음엔 대대 정치위원에서 평대원으로 강등돼 보총을 메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민생단 혐의를 벗겠다고 동녕현성 전투 때 작탄대를 데리고 맨 앞장에서 서산포대 점령하려 돌격했습니다. 북한은 이 전투를 김일성이 지휘했다고 거짓말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두 번째 민생단 혐의도 가까스로 벗습니다. 조선인 혁명가 중에서 두 번이나 민생단 감투에서 빠져나간 사람은 김일성이 유일했습니다. 김일성의 뒤를 봐준 사람들이 왕다노대로 불렸던 중국 동만주지구 특위위원 왕윤성과 공청단 만주성위원회 특파원이던 종자운이란 한족 간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김일성을 봐준 이유는 그가 말빨 하나는 끝내 줬기 때문입니다. 임기응변의 화술로 상대를 녹여버리는 김일성의 말재주는 훗날 소련에 들어가서도 붉은 군대 간부들의 눈에 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김일성은 길림에서 유학해 중국말에 능통했습니다. 당시 조선인 중 중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그러니 김일성이 중국인 간부들의 눈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잘 빠져나가던 김일성도 독립사 윤창범 연대장이 민생단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한 이후에 그를 도왔다는 누명을 벗기 힘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비밀 문서고에 보관된 당시 민생단 문건에는 김일성 관련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한옥봉은 한흥권 중대장의 여동생이고, 김 정위는 정치위원이던 김일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옥봉이 김 정위의 아이를 임신하게 됐는데, 김 정위가 한옥봉을 강으로 데려가 맨발을 벗고 찬물 속에 한 시간을 넘게 서있게 했다. 그렇게 하면 임신한 여자가 아이를 떨어뜨린다고 한의사를 했던 외삼촌에게 배웠던 방법이라 했다. 그래도 아이가 떨어지지 않으니 이번에는 발로 수십 번이나 배를 걷어찼는데 정말 아이가 떨어졌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김 정위가 다시는 한옥봉을 찾지 않았다.”

물론 민생단 구술서는 워낙 가혹한 심문 끝에 나온 거라 믿을 만한 것은 못됩니다만, 아무튼 당시 김일성은 윤창범 탈출 방조죄에 한옥봉 임신 혐의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윤창범 탈출 후에 민생단 숙청위원회에선 김일성을 체포하기 위해 한 개 중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전해들은 김일성은 한흥권의 중대를 데리고 나자구로 가는 척 하다가 뒤틀라즈로 몰래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종자운과 왕윤성과 함께 근거지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북만으로 이동했다고 보고해달라고 입을 맞춘 뒤 야밤을 틈타 동만을 떠나 북만으로 갔습니다. 당시 북만에는 동녕현성 전투 때 얼굴을 익혔던 주보중 부대가 있었는데 거기로 피신을 간 것이죠. 노야령을 넘을 때는 굶어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주보중 부대에서 김일성을 맞았던 강신태 즉 강건은 1946년 동북 연변군분구 사령원으로 있을 때 이런 증언을 남겼습니다. “주보중 지시로 북만에 온 김일성을 맞이하러 가서 처음 봤는데, 어찌나 많이 굶었고 말랐던지 뼈밖에 없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이 약해 보였다.”

당시 헐벗고 삐쩍 마른 김일성의 모습은 꽃제비와 다를 바 없었을 겁니다. 주보중 부대를 따라다니던 김일성은 동만의 민생단 투쟁을 시정하라는 지시를 받은 중국 공산당 특사 오평을 만나 힘을 얻고 1935년 2월 다시 동만에 옵니다. 올 때도 죽을 뻔 했다가 조택주 노인을 만나 겨우 살아났죠. 이것이 1차 북만원정의 진실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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